한 걸음 한 걸음 가을이 묻어나는 걷기 여행
봄은 연두, 여름은 진초록, 가을은 한두 가지 색으로 규정하기 힘든 색의 결정판이다.
겨울은 한 차례 파티가 끝난 뒤 밀려오는 공허함처럼 탈색된 듯한 흑과 백으로 세상이 뒤덮인다.
이렇게 색으로 표현되는 계절의 질기고도 질긴 사계절의 고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된다.
그렇게 다시 돌아와 색의 정점에 다다른 지금, 천천히 걸으며 마음에 다채로운 가을색을 칠해보는 건 어떨까.
대한민국 억새 1번지 ‘강원도 정선 민둥산’
색채의 마술에 걸려든 듯한 가을은 단풍과 억새의 계절이다. 단풍과 억새의 색감은 매우 대조적인데 단풍은 화려하고 억새는 흑백에 가깝다. 이에 단풍놀이가 색을 과시하듯 들뜬 기분이라면 억새는 차분하고 감성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억새가 유명한 곳은 전국에 흩어져 있다. 경기도 포천 명성산과 울산 신불산, 경남 창녕 화왕산, 전남 장흥 천관산과 강원도 정선 민둥산이 5대 억새군락지이다.
이 가운데 민둥산은 9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억새꽃이 만개해 가장 오랫동안 억새 물결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민둥산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도관광 산행지로도 유명하다. 태백선 민둥산역에서 민둥산 등산로 초입인 증산초등학교까지 도보로 20분 거리다. 이런 연유로 자가용보다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 은빛 억새와 기차 여행이라니 환상적인 조합이 아닌가. 민둥산은 이름 그대로 민둥산이라 나무가 없다. 과거 화전민들이 산에 불을 놓아 잡목을 태우고 밭을 일궈 살았는데 1974년 이후 경작이 금지돼 화전민들이 떠나면서 드넓은 주능선 일대는 억새군락지가 됐다. 규모도 엄청나 축구장 면적의 90배가 넘는다.
민둥산 등산코스는 총 4개로 나뉘는데 그중 남면 증산초등학교에서 출발해 쉼터를 거쳐 정상에 이르는 코스가 가장 인기다. 증산초등학교를 지나면 경사가 완만한 3.2km와 가파른 2.6km 중 택할 수 있는 지점이 나오지만 너무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2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말이다. 다만 우리나라 억새군락지가 대부분 그렇듯 민둥산 역시 드넓은 억새초원을 보려면 우거진 숲길을 40분가량 올라야 한다. 이후 8부 능선쯤 이르면 정상까지 광활한 억새군락지가 펼쳐진다. 탁 트인 전망과 청정하고 시원한 가을바람이 주는 쾌감은 코로나 블루쯤 단번에 날려버릴 기세다.
민둥산은 대한민국 억새 1번지가 분명하다. 산 전체가 온통 억새로 뒤덮여 억새의 향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 묵객들은 가을 억새를 시간대에 따라 달리 불렀다. 이른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억새를 ‘은빛 억새’, 붉게 물든 일몰에 빛나는 억새를 ‘금빛 억새’, 고즈넉한 달빛에 춤추는 억새를 ‘솜털 억새’라고 했다. 이 중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건 은빛 억새로 산 전체가 은빛 억새로 물결치면 바람에 이는 억새와 함께 춤이라도 추고 싶은 마음이 든다. 민둥산 억새꽃은 그렇게 마음속에 황홀한 가을색을 새겨놓는다.
의미와 가치 빛나는 인문기행 ‘경기 수원 대한독립의 길
조선 부흥을 이끌었던 정조는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자신이 꿈꾸던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런 수원화성은 특히 이맘때 가을색채와 어우러진 피안의 성이자 시민들의 안식처 노릇을 톡톡히 해왔다. 근대사에서 수원은 일제에 저항하는 항거의 도시로도 기억된다. 수원시가 그 역사의 흔적들을 엮어 인문기행코스 ‘대한독립의 길’을 조성했다.
대한독립의 길 시작점은 연병장의 지휘본부인 연무대다. 가까운 곳에는 일본인 선교사가 개척한 동신교회가 있고, 걷다 보면 수원 여성교육의 요람 매향중학교와 수원 근대교육의 요람 삼일남학교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 행궁 앞 광장에 이르면 붉은 벽돌로 지은 수원종로교회와 단아한 여민각도 등장한다. 그냥 보기 좋고 걷기 좋은 길이 아니다. 사실 평범해 보이지만 모든 곳들이 의미를 알면 더 특별해진다. 이 모든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 서장대다. 팔달산 가장 높은 곳 서장대에 올라서서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보면 아마도 수원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앞서 소개한 대한독립의 길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하자면 우선 1919년 3월 16일 연무대 일원에서 수원 사람들은 들불처럼 일어나 대한독립을 외쳤다. 그 외침이 처음 울려 퍼진 곳은 방화수류정. 이곳은 전시엔 군사지휘소로 사용됐으나 평시엔 주변 풍광을 즐기며 쉬는 곳이었다. 그리고 방화수류정과 이어진 화홍문은 가을색과 어우러져 고색창연한 멋을 풍긴다.
이어 만나게 되는 동신교회는 일본인 노리마츠 목사가 개척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전한 선교사라 하면 대부분 푸른 눈의 서양 선교사를 떠올리지만 이곳만큼은 다르다. 노리마츠 목사는 수탈과 압제를 일삼던 여타 일본인과 달리 고통받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이런 노리마츠 목사에 감동한 지역민들이 지금의 교회 터와 건축비를 헌금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왔다.
걷다 보면 매향중학교도 눈에 담을 수 있다. 미국 감리회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가 1902년 건립하고 그 뒤를 이어 밀러 교장이 수원 여성교육과 여성 지도자의 산파로 성장시킨 곳이다. 또 수원 근대교육의 요람인 삼일남학교는 독립운동가 임면수 선생과 지역 기독교인들이 협력해서 세운 뜻깊은 학교다. 교정 한편에 있는 아담스기념관(경기도기념물 제175호)은 건축비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접한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노스 아담스교회 교인들이 헌금을 보내와 지은 것이다.
행궁 앞 광장에 이르러 만나게 되는 붉은 벽돌의 수원종로교회와 단아한 여민각도 의미가 있다. 수원종로교회는 1901년 스크랜튼의 지도를 받은 이명숙 전도사가 설립해 1969년 지금의 교회당으로 증축했는데 이 교회의 신자 다수는 3·1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지도자였다. 또 여민각은 ‘백성과 더불어 즐긴다’는 뜻으로 정조의 애민정신을 담고 있다.
여기에 현대적 힐링을 가미해본다. 사실 대한독립의 길에는 쉴만한 카페도 많다. 특히 나혜석 생가터 일원에 옹기종기 모여 있어 이곳을 왕의 골목이라 부른다. 분위기는 한적하고 여유롭다. 휴식이 끝났으면 마지막으로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서장대다. 팔달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곳에 오르면 화성행궁이 한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수원시가지가 아득히 펼쳐진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수원은 선명하고 깨끗한 가을의 청초한 색으로 빛이 난다. 그래서 이곳을 걸으며 만났던 곳곳의 의미와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새겨놓는다.
수원화성이 생각보다 넓어서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 지 고민했었는데 가이드가 있어서 좋네요! 억새가 지기 전에 꼭 가봐야겠습니다~
이 글을 보니 억새가 가득한 강원도 정선 민둥산에 저도 꼭 가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드네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
민둥산 억새평원 가보고 싶네요~~ 가서 억새가 가득한 가을의 풍경도 잔뜩 보고 일몰도 보고 오고 싶네요.
다양한 가을행사들이 많은데, 꼭 찝어주신곳에 한번 방문해야겠습니다.
화성행궁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늘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선입견으로 가지 않게 되네요. 방화수류정 야경 넘 좋네요. 야간에는 어떨지 한 번 나서봐야겠네요. ^^
가까운 수원에 볼거리가 많았네요~ 참고하겠습니다
거닐며 사색하고, 다른 생각들은 뒤로하고 현재에 집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