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리 Together Vol. 141  2023.12월호

고결한 성지에서 만나는 위로와 힐링

모든 더러움을 씻듯 순백의 눈이 대지를 덮었다. 새하얀 눈밭 사이로 삐져나온 붉은 이파리는 지난 가을 핏빛으로 물든 낙엽의 잔재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려 붉은 피를 흘린 순교자의 모습이 이럴까. 흰 눈이 대지를 뒤덮은 날 영혼의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남양성모성지’와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유적지 ‘솔뫼성지’를 찾았다.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지친 영혼의 쉼터가 되어줄 ‘화성 남양성모성지’

화성 시내에서 남양리로 가는 길에는 나지막한 동산이 있다. 울창한 숲 위로 우뚝 솟은 2개의 붉은 벽돌탑이 예사롭지 않다. 자연스럽게 펼쳐진 산책로가 마치 탑으로 안내하듯 발걸음을 이끈다. 남양성모순례지는 로마 교황청이 지정한 성모성지 30곳 중 한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 많은 순교자가 이름도 없이 죽어간 곳이다. 하지만 증언록에 기록된 순교자는 고작 4명에 불과하다. 속절없는 세월, 잡풀만 무성한 채로 한 세기가 지났다. 이후 1983년부터 성역화를 시작해 1991년 한국 천주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순례지로 선포됐다. 이후 3만 명 이상의 천주교인들이 헌금을 모아 2011년 남양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건립하기로 했는데 설계를 ‘영혼의 건축가’라 불리는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맡았다. 그는 교보문고 강남사옥과 리움미술관 등을 설계한 세계적 거장이다. 그의 건축미는 줄무늬를 섞은 벽돌을 이용해 자유자재로 기하학적 건축물을 세우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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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보타는 “대성당은 디테일이 생명이니 서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작업을 시작했다. 설계에만 꼬박 5년이 걸렸는데 윤곽은 골짜기에 자리 잡은 대지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리고 10여 년의 건축 끝에 아름다운 위용을 드러냈다. 대성당은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가득하다. 단아한 붉은 벽돌과 거친 흰 벽돌이 촘촘히 쌓여 성곽의 느낌도 표현했다.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두 탑 위로 얄팍한 창이 햇빛을 반사하며 보석처럼 빛난다. 그 위에 달린 7개의 작은 종도 바람 따라 흔들린다.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충만한 기운이 가득하며 기하학적인 천창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은 섬세한 빛을 사방에 흩뿌린다. 십자가 좌우 벽화 <수태고지>와 <최후의 만찬>은 줄리아노 반지의 작품이다. 실내는 오전 11시 미사 때만 개방한다. 야외로 나오면 세심하게 디자인된 조경과 각종 조각상이 영성의 세계로 초대한다. 고통 당하는 예수상과 성모 마리아상의 모습이 숙연하다.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으며 조용히 명상에 빠져본다. 길은 조용하지만 알 수 없는 치유의 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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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품에 안긴 거장의 작품에서 풍기는 아우라 덕분일까. 한때는 야트막한 동산에 불과했던 이곳이 종교와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찾는 문화성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은 한결같지 않을까? 나를 향한 작은 위로와 지친 마음의 치유, 그것보다 간절한 것은 없을 테니 말이다.

* 문의 : 남양성모성지 031-356-5880

순교자의 기억이 눈꽃으로 피어나는 ‘당진 솔뫼성지’

충남 당진은 인근의 홍성, 태안 등과 함께 내포 지역에 속한다. 내포란 바다 물길이 하천을 따라 내륙 깊숙이 연결되는 곳을 말하는데 이런 곳은 물길과 함께 각종 신문물도 재빠르게 유입된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배경으로 외래문명에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 결과 조선 후기 외세를 거부하는 쇄국정책과 그로 인한 천주교 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내포 지역에서 죽어갔다. 그중에서도 당진 솔뫼성지는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의 첫 장을 연 곳이다. 당진 솔뫼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곳으로 그는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청년 김대건은 솔뫼에서 태어나 모방 신부에 의해 마카오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서양문물을 익혀 우리나라 최초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귀국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2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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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문화재인 솔뫼성지에는 김대건 신부의 생가 유적이 복원돼 있는데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찾으며 세계적인 천주교성지로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지난 2021년에는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지은 대성당과 함께 가톨릭 예술공간이 조성됐다. ‘소나무가 뫼를 이루고 있다’라는 뜻의 솔뫼에는 소나무 80여 그루가 신앙의 절개를 지키듯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눈 내린 솔뫼성지는 호젓한 정취가 가득하다. 눈길을 밟으며 경내를 걷다 보면 사뭇 마음이 차분해진다. 잘 가꿔진 조경을 따라 김대건 신부 생가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면 생가 앞에 교황 방문을 기념한 프란체스코 교황 조각상이 놓여 있다. 의자에 앉은 채로 생가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성당은 ‘기억과 희망’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순교자의 신앙이 꽃처럼 피어나길 희망하는 마음에서 장미꽃 형상을 따라 지었다. 성당 내부는 강렬한 색감이 이채로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압도적이다. 김대건 신부 기념관 주위에는 작은 연못이 둘려 있는데 마치 김대건 신부 일행들이 목숨 걸고 중국으로 오갔던 작은 배 라파엘호를 연상시킨다. 기념관 안에 들어서면 짧지만 강렬했던 그의 생애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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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솔뫼성지와 가까운 신리성지와 합덕성당도 당진의 성지순례코스에 속한다. 신리성지가 자리한 신리는 조선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였던 지역으로 많은 순교자를 낳았다. 성지에는 주교의 은신처와 순교자기념관 그리고 미술관 등이 있다. 1929년 고딕양식으로 건축된 합덕성당은 아산 공세리성당과 함께 한국의 아름다운 성당으로도 손꼽힌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혹시 마음 한 자락을 붙잡고 있는 남모를 고민이 있는가? 그렇다면 성지순례코스를 걸어보는 건 어떨까. 무엇을 고민하든 그 마음에 위로를 건넬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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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 : 솔뫼성지 041-362-5021, 신리성지 041-363-1359, 합덕성당 041-363-1061

댓글 5

  • 최인혁님

    천주교 신자로서 화성 남양성모성지에 꼭 한번 다녀와야겠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 김응숙님

    삼천리 홈페이지에서 이렇게 훌륭하고 영광스럽게 촬영하신 분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남양성지,솔뫼성지, 신리성지 이렇게 아름답고 마음에 닿는 성지를 보게되니 스트레스 확확 풀리는  듯 합니다.
    이미 견학하였지만 화면으로 보니 더욱 더 감회 롭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태현님

    사진을 보니 조형물들이 예쁘고, 깔끔을 느끼네요

  • KfnqDuxw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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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fnqDuxw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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