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이야기

70년 이야기

삼천리 창립과
도시가스 사업 진출

1955 ~ 1992

1. ‘삼천리’ 70년 역사의 시작 

1950년대의 연탄산업 환경 

삼천리그룹의 모태인 <삼천리연탄기업사(三千里煉炭企業社)>(이하 약칭 ‘삼천리’)는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55년 10월 1일 서울 을지로에서 창립했다. “삼천리 강산에서 제일 가는 1등 기업이 되겠다”는 뜻에서 상호를 ‘삼천리’로 정했다.
당시 우리 국민 대다수가 난방과 취사에 사용하는 생활 연료는 신탄(薪炭)이라고 부르는 나무(숯)였다. 1956년 기준으로 에너지원의 73.9%가 신탄이었고 석탄은 겨우 18.7%에 불과했다. 하지만 신탄의 과다한 사용은 그렇잖아도 6·25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산림을 훼손하는 원인이 되었다.
정부는 황폐해진 국토를 녹지로 재생하기 위해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산림녹화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또 전쟁 피해 복구 및 석탄산업 활성화를 위해 ‘석탄 개발 5개년 계획 및 연료종합 5개년 계획’도 수립해 시행했다. 정부가 산업 현장은 물론 가정에서도 석탄의 사용을 장려하고 나선 것이다.
우리나라에 연탄이 전파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으로 알려져 있다. 부산에서 일본인이 구멍이 9개인 9공탄을 제조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초기에는 주로 산업용으로 연탄이 사용되었다. 해방 이후까지도 대중화되지 않다가 1950년대 들어 정부가 산림녹화 정책과 연탄사용 장려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가정용 연탄이 빠르게 보급되었다.
연탄은 가내수공업 형태의 소규모 공장에서도 비교적 어렵지 않게 생산이 가능했으므로 생산업자가 급증했다. 1956년 서울에만 해도 400여 개소의 연탄공장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삼천리였다. 따라서 창립 당시만 해도 삼천리를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황주(李璜周) 공
윤윤옥(尹允玉) 여사
1951. 흥성상점(興盛商店) 경영

청년 사업가 이장균의 등장

삼천리를 창업한 사람은 유성연·이장균 선대회장이다. 청년 시절 특별한 인연을 맺어 온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1953년 들어서는 앞으로 무연탄이 중요석원(石園) 이장균(李壯均) 선대회장은 1920년 6월 27일 함경남도 함주군 상기천면에서 이황주(李璜周) 공과 윤윤옥(尹允玉) 여사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대대로 유교적 가풍을 이어 온 유학자 가문이지만, 일제강점기에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릴 때부터 책임감이 강하고 효심이 깊었던 그는 겨우 일곱 살의 나이에 인근 마을에 소여물을 베는 꼴머슴으로, 좀 더 나이가 든 후에는 공사장에서 지게를 지는 일꾼으로 나서야 했다. 하지만 일을 하면서도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밤마다 야학(夜學)에 다니며 주경야독했다. 덕분에 어려운 형편에도 정규 학교인 주북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해 졸업할 수 있었다.
스무 살 무렵인 1940년에는 “성공하지 않으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함경도 최대 도시인 흥남으로 떠나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흥남질소비료공장, 함남토목㈜ 등 산업체에서 근무하며 다양한 현장경험을 쌓았다. 이때의 경험이 사업가로 성장하는 초석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인 관리자들의 횡포에 곤란과 설움을 겪는 일도 다반사였다.
한번은 함남토목에서 일할 때 함께 일하는 동포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지 못한 것을 보고 앞장서 싸우기도 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그의 용기와 성실함을 눈여겨 본 한 임원의 배려로 회사에서 독립해 노동자들을 관리고 알선하는 사업을 맡았다. 첫 개인사업인 셈이었다. 이 사업에서 그는 신뢰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업 수완을 발휘해 많은 이문을 남겼다. 수익금은 고향의 부모님에게 보냈다.
광복을 맞이한 후에도 이장균 선대회장은 함흥에 남아 해바라기씨, 통조림, 초콜릿 등의 물품을 판매하는 장사를 하며 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신뢰를 최고의 덕목으로 실천한 덕분에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수익도 괜찮았다. 모두를 흥하게 하자는 뜻을 담아 ‘민흥상회(民興商會)’라는 상호도 처음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번창하던 민흥상회는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문을 닫아야 했고, 급기야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이장균 선대회장은 흥남철수작전 때에 국군의 도움을 받아 배를 타고 포항으로 피난했다. 그리고 고향친지의 집에 기거하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친지의 소개로 평생의 반려자가 된 김성숙(金性淑) 여사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장균 선대회장은 피난 중에도 변함없이 성실하게 장사 수완을 발휘하여 약간의 자금을 모았다. 노점을 시작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포항의 대표적 시장인 죽도시장 중심부에 가게를 얻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흥성상점(興盛商店)’이라는 간판을 걸고 고춧가루, 밀가루, 설탕, 비료, 무연탄 등의 생활필수품을 판매했다.
전쟁 중이라 생활필수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환경이었으므로 장사는 비교적 잘 되었다. 하지만 이장균 선대회장은 이익을 남기기보다는 피난민에게도 도움이돼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자칫 각박해지기 쉬운 전시 상황에서도 오로지 신뢰를 판다는 생각으로 좋은 제품을 속임수 없이 정직하게 팔고자 했다. 덕분에 흥성상점은 포항에서 가장 큰 상점 가운데하나로 떠오를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송은 유성연과 석원 이장균의 만남

흥성상점을 경영하면서 이장균 선대회장은 신탄을 직접 제조해 판매했다. 1953년 들어서는 앞으로 무연탄이 중요한 연료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무연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부산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는 거리의 상점들과 일부 부유층 가정을 중심으로 연탄을 사용하고 있었다. 대형 상점과 사업장에서는 무연탄을 뭉쳐서 만든 덩어리를 난방 및 취사, 또는 사업용으로 사용하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장균 선대회장은 미래에 있을 원탄 구매에 대비하여 탄광이 있는 강원도를 직접 찾아가 현장을 살펴보기도 하고, 나중에 저탄장으로 쓰기 위해 서울 을지로에 대략 331㎡(약 100평) 규모의 나대지를 임차하기도 했다. 미래를 내다본 투자였다.
그런데 1955년 봄, 서울의 대형 극장인 단성사가 난방용 원탄을 구매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 이장균 선대회장은 즉시 강원도 탄광지역을 돌며 어렵게 원탄을 구매했다. 그리고 열차(화차)와 배, 트럭으로 몇 번을 옮겨 수송하는 우여곡절 끝에 을지로 저탄장까지 원탄을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수송경비는 예상치의 두 배가 소요되었다. 하지만 단성사가 그 사이에 무연탄 가격이 하락했다며 당초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하는 바람에 거래가 무산되었다. 그 바람에 천신만고 끝에 서울까지 운송한 무연탄은 결과적으로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다.
수요처 없이 저탄장에 쌓여 있는 무연탄을 바라보며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던 이장균 선대회장은 당초 계획을 앞당겨 곧바로 연탄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정부가 산림녹화 5개년 계획의 연장선상에서 연탄 사용을 권장하는 중이었으므로, 연탄 사업은 정부 정책에 부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편리한 생활을 제공하고 이익도 남길 수 있는 일거삼득의 신사업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연탄 사업은 포항에서 운영하던 조그만 상점과는 달랐다. 을지로 저탄장에 천막을 치고 수동식 제탄기 1대를 이용하여 연탄을 만들어 팔았지만 혼자 힘으로는 사업화하기가 어려웠다. 이장균 선대회장은 ‘믿을 만한 동업자’를 구해 제대로 사업을 펼치기로 하고, 1955년 10월 1일 송은(松隱) 유성연(劉成淵) 선대회장을 찾아가 “연탄 사업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지금의 삼천리그룹이 창립기념일로 삼고 있는 바로 그날이었다.
유성연 선대회장은 1917년 12월 27일 함경남도 함주군 삼평면 부흥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함흥제일보통학교와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인텔리 청년이었다. 졸업후에는 교편을 잡고 후학 양성에 힘썼으나 광복 후 교단을 떠나 이장균 선대회장처럼 함흥에서 식료품 상점을 운영했다.
우연찮게 같은 지역에서 자신들의 상점을 운영하던 두 사람은 상품이 부족할 때 서로 지원하면서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이때부터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친형제 이상의 관계로 발전했다. 1948년에는 두 사람 모두 함흥 시내 연지리로 가게를 옮겨 가까이 지내면서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성연 선대회장은 황급히 남쪽으로 피난하여 거제도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서 미군을 상대로 토속기념품을 판매하고 신문지국과 서점 등을 운영하며 자금을 모았다. 하지만 형제처럼 지내던 이장균 선대회장과는 한국전쟁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
월남하여 각자 사업을 하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천운이 따랐는지 두 사람은 우연찮게 소식을 듣게 되어 다시 만나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유성연 선대회장이 서울로 이사하고, 이장균 선대회장도 서울에서 연탄 사업을 하기로 하면서 그 인연은 서울에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처럼 인연이 깊은 두 사람은 이장균 선대회장의 제안에 흔쾌히 뜻을 모아 동업하기로 약속했다. 이 약속이 우리나라 기업의 역사에서 ‘최고의 모범적인 동업’으로 평가받는 삼천리 역사의 시작이었다.

<삼천리연탄기업사> 창업 및 신당공장 가동

함께 동업하여 연탄 사업을 시작하기로 한 이장균 선대회장과 유성연 선대회장은 “우리 제품으로 삼천리 반도를 석권한다”는 포부를 담아 상호를 &;lt;삼천리연탄기업사>로 정했다. 나이가 세 살 많은 유성연 선대회장이 사장을 맡아 서울에서 연탄 제조와 판매를 담당하고, 이장균 선대회장이 부사장직을 맡아 포항에 거점을 두고 원탄 구매와 자금을 담당하기로 역할도 나누었다.
그러나 창립 초기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일부 부유층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국민이 여전히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고 있고, 원탄 가격은 지속적으로 하락해 수익성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을지로 저탄장 터의주인이 공장을 비워달라고 요구해 자칫하면 시작부터 사업이 좌초할 위기에 봉착했다.
새 입지를 모색한 끝에 신당동 248-2번지 터를 임차하여 을지로에 있던 저탄장 시설을 이전했다. 동시에 족답식(足踏式) 제조기 한 대를 새로 구입해 1956년 7월 공장문을 열었다. 이곳이 사실상 삼천리 성장의 모태가 된 신당공장이다. 이를 계기로 이장균 선대회장은 공장 정상화를 위해 포항의 모든 사업을 정리하고 1956년 12월 5일 거처를 서울로 옮겼다. 또 두 창업자의 투자비율을 50대 50으로 정하고 각자의 역할도 새로 조정했다.
두 사람이 한데 모여 본격적인 동업 시대를 열게 되면서 연탄 사업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동대문구 전농동 청량리역 부근에 전용 저탄장을 새로 마련하고, 신당공장과는 별도로 그곳에서도 원탄 분쇄 및 배합 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연탄공장 가운데 원탄의 분쇄·배합 공정과 생산 공정을 나누어 시행한 것은 삼천리가 처음이었다.
삼천리는 고품질의 연탄을 값싸게 공급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질 좋은 원탄을 확보하는 데공을 들이는 한편, 배합 비율에 대해 연구하고 생산 방식도 개선하여 제품의 품질을 높였다. 고품질의 제품을 저렴하게 공급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삼천리 연탄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삼천리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자 시중에서는 수많은 유사품이 나돌았다. 이에 삼천리는 자사 제품을 차별화하고 독자성을 지키기 위해 처음으로 ‘반달표’라는 상표를 도입했다. 일종의 브랜드 전략인 셈이었다. 발명특허(제368호)도 받았다. 이에 힘입어 삼천리는 신당공장 가동 이후 불과 6개월 만에 초기 투자금의 두 배가 넘는 수입을 기록할 정도로 빠른 성장세를 이어갔다.

1955.10.01. 삼천리연탄기업사 창업
1956.12. 청량리저탄장 확보

‘아름다운 인연’의 시작

우리나라 산업사에서 최고의 ‘동업 모델’로 손꼽히는 유성연·이장균 선대회장의 인연은 매우 극적이다. 마치 드라마처럼 만나고 헤어졌다 다시 만나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인연으로 맺어진 과정은 ‘아름다운 동행’으로 표현되면서 ‘전설’처럼 후대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유성연 선대회장과 이장균 선대회장의 만남은 해방과 6·25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해방 이후두 사람은 기존에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다가 그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했다. 유성연 선대회장은 선덕비행장에 주둔한 소련 공군을 상대로, 이장균 선대회장은 함흥 시내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식료품 위주의 장사를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같은 품목의 상품을 취급한 것은 이 둘이 인연을 맺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두 사람은 고객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장사의 기본에 충실하면서 상점을 운영했다. 그러던 중에 소련군이 좋아하는 통조림 제품을 구하기 위해 수소문하던 유성연 선대회장이 이장균 선대회장의 상점에 그 제품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이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서로 돕고 의지하는 의형제 같은 관계로 발전했다. 특히 1948년에는 두 사람 모두 연지리 시장으로 상점을 옮겨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었고, 주변 상인들과 함께 ‘8인계’를 조직할 만큼 가깝게 지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두 사람은 헤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고, 자칫하면 그렇게 인연이 끝날 수도 있었다. 이장균 선대회장은 흥남에서 철수하는 국군의 배를 타고 포항으로 피난을 갔고, 유성연 선대회장도 우여곡절 끝에 남쪽으로 내려와 거제도 난민수용소에 머물게 되었다. 이후 이장균 선대회장은 포항에서 고춧가루 등 식료품 장사를 하며 기반을 잡았다. 유성연 선대회장도 수용소를 빠져나와 거제도에서 미군을 상대로 토속기념품을 팔기 시작했다. 신문지국과 서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장사가 잘 돼서 1년 만에 큰돈을 모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잊지 못하고 행방을 찾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수소문을 계속했다. 이 간절함이 통했는지 두 사람은 거짓말처럼 다시 재회했다. 이장균 선대회장의 매형이 우연히 유성연 선대회장을 만나면서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포항과 거제도를 오가며 깊은 정을 나누었고, 1954년 초에 유성연 선대회장이 서울에 정착한 뒤로는 포항과 서울을 오가며 오랜 인연과 신뢰의 만남을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사업을 함께 하며 다시는 헤어지는 일없이 평생을 함께하는, 동업자라기보다는 동반자와 같은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2. 생산시설 확충 및 경영체제 재정비

생산공장과 저탄장 시설 확충

‘반달표’라는 고유의 상표를 도입한 이후 삼천리 연탄의 판매량은 더욱더 늘어났다. 삼천리는 급증하는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생산시설 확충에 나섰다. 먼저 1957년 신당공장에 소형 프레스식 기계 4대와 중형 프레스식 기계 1대 등 신형 설비를 도입해 생산성을 크게 높였다. 당시로서는 첨단시설이라 할 수 있는 컨베이어벨트도 설치해 수송과 하역을 원활하게 했다.
또 동대문구 제기동 성동역 부근에 있는 공터를 임차해 저탄장으로 활용했다. 이곳에 소형 프레스식 기계 1대를 설치해 보조공장으로 운영함으로써 신당공장이 안고 있던 부족한 공간 문제도 상당 부분 해결했다.

1956. 반달 상표 도입

1961년 8월에는 성동구 상왕십리동에 있던 연탄공장을 인수해 인창공장으로 새단장하고, 제기동 저탄장에 있던 보조공장을 그 옆으로 옮겨 제기공장을 건설했다. 이어 1964년 9월에는 수색역 옆 서대문구 교남동에 수색공장을 건설하여 서울 서부지역 시장 개척에도 나섰다. 여세를 몰아 인근에 있는 또 하나의 연탄공장을 인수해재정비한 후 태창공장으로 이름 붙여 가동하면서 서울서남부지역으로 판매지역을 넓혀나갔다.

1961.11. 제기공장 확장 이전

1965년 8월에는 수색공장의 물량을 분담하고 한강이남 지역의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영등포구 독산1동에 시흥공장을 건설했다. 이에 따라 1965년 기준으로 삼천리의 생산공장은 신당·제기·인창·수색·태창·시흥공장 등 모두 6곳으로 늘어났다.
양질의 원탄을 확보하여 원활한 수급망을 구축한다는 취지에서 강원 지역에 저탄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1962년 2월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에 예비 저탄장을 확보했다가, 같은해 12월 이를 대체하여 태백시 황지동 황지역에 2만 톤의 저탄능력을 갖춘 역두저탄장을 마련했다. 1963년 3월에는 태백시 문곡동에 기존의 황지 역두저탄장을 대신할 문곡저탄장을 새로 설치해 확장 이전했다.
시설을 확장하다 보니 생각지 못한 문제점이 드러났다. 일부 공장에서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판매지역이 중복되는 등의 비효율이 발생한 것이다. 삼천리는 생산시설을 재정비하고 판매권역을 조정하는 시설 효율화 작업을 착수했다. 먼저 1966년 4월 인창공장을 폐쇄하여 직매소로 전환하고, 수색공장과 역할이 중복되는 태창공장은 폐쇄했다. 강원도 태백의 문곡저탄장도 폐쇄 조치했다. 그 결과 1966년 7월 기준으로 삼천리의 생산시설은 신당·제기·수색·시흥 등 4개의 기간공장과 청량리·성동역 등 2개의 저탄장 체제로 조정되었다.

1964.09.10. 수색공장 신설 가동
1965.08. 시흥공장 건설

운송능력을 높이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삼천리는 1957년 트럭 1대를 임차해 원탄 수송에 투입했다. 또 1958년 9월 최초로 원탄 수송용 화물자동차를 구입한데 이어 1961년에는 3대의 트럭을 추가 구입해 수송능력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당시에는 손수레를 이용해 운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삼천리는 트럭을 운영함으로써 원탄 수송을 원활하게 하고 대량의 연탄을 적기에 소비자에게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원탄 보관 및 연탄 생산 과정에서 공해가 발생한다는 지역주민들의 민원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이에 삼천리는 이장균 선대회장이 직접 나서서 주민들과 진솔하게 대화하며 공해방지를 약속하는 등 상생을 모색했다. 지역주민들의 피해를 줄이자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환경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 환경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매우 선구적인 노력이었다.

1958.09. 자가용 화물자동차 최초 구입

‘품질제일주의’와 22공탄 개발

소비자의 신뢰가 깊어지고 상품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창립 이듬해 연간 2,500톤 규모이던 반달표 삼천리연탄의 연간 생산량은 창립 10년 만인 1965년 13만 톤 수준으로 급증했다. 이에 삼천리는 소비자의 신뢰와 성원에 보답하면서 지속적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도록 ‘품질제일주의’를 기본 가치로 내걸고 우수한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는 노력을 계속했다.
무엇보다도 연탄 품질 개선을 위해 원탄의 종류를 도계탄, 장성탄, 옥동탄 등으로 다양화했다. 그런데 다양한 원탄을 사용하다 보니 각 원탄마다 탄소 함량과 열량에 차이가 나는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삼천리는 1961년 실험실을 설치해 일정한 열량의 연탄을 생산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을 강화했다. 실험실이 삼천리 최초의 R&D 조직인 셈이었다.
실험실은 열량 문제를 해결한 고품질의 연탄 개발에도 착수하여, 1964년 국내 최초로 22공탄을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에 개발된 9공탄을 사용하다가 한국전쟁 후에는 주로 19공탄을 사용하고 있었다.
22공탄은 열량, 연소시간, 타고 남은 재의 경도(硬度) 등에서 19공탄은 물론 그 무렵 타사가 개발한 25공탄 제품보다 우수해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삼천리는 우수한 품질이 인정된 22공탄을 태창공장에서 생산하기 시작해 1966년 10월부터는 전 공장에서 생산했다.
삼천리의 주력 제품이 된 22공탄은 삼천리의 기술과 품질제일주의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워낙 품질이 뛰어나, 한때 시장을 주도했던 19공탄을 제치고 ‘연탄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당시 서울의 연탄시장은 강원산업의 삼표연탄이 독주하는 가운데 삼천리와 한성연탄, 대성연탄, 한일연탄 등 4개 사가 그 뒤를 추격하는 형세였다. 이외에도 서울에만 모두 160여 개의 연탄공장이 각축전을 벌였는데, 22공탄은 시장에서 삼천리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삼천리는 22공탄의 제조법에 대해 특허등록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국민적 연료인 연탄의 제조법은 모든 생산자가 공유해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삼천리의 창업정신과 경영진의 철학에 따른 것이었다. 기업활동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편리한 생활을 제공하겠다는 창업 당시의 초심을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1965.10. 22공탄 생산

본사 중심으로 경영관리 효율화 추구

유성연·이장균 두 선대회장이 동업하여 창업한 삼천리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이에 따라 관리업무와 영업활동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직을 확대해야 했다. 특히 인력을 충원하는 것이 시급했다.
창립 당시 삼천리는 두 사람의 창업자 외에 10여 명의 생산직 노동자와 사환이 전부였다. 이들만으로는 사업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삼천리는 1957년 1월 이득호 사원을 1호 사원으로 채용하여 신당공장에 배치했다. 이후에도 수시로 인력을 채용하여 각 공장에 배치하고 생산관리, 연탄시험, 경리 등의 업무를 맡도록 했다. 또 강원도 산지에 처음으로 주재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1964년에는 최초로 대졸 신입사원을 공개채용해보다 체계적인 경영관리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때 삼천리는 연고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공개적이고 합리적인 채용관리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1965년 말에는 사원 수가 190여 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직원 수가 급증하게 되자 조직 운영 방식도 새롭게 정비할 필요가 생겼다. 삼천리는 1965년 창립 10주년을 맞아 그동안 각 공장이 독립적으로 운영하던 관리체계를 본사 중심으로 통합해 경영관리의 효율을 높였다. 동시에 본사의 기능을 세분화하여 전문성을 추구하고, 임금제도, 문서처리 규정 등 각종 제도도 한층 현대적으로 재정비했다.
한편, 1960년 5월 삼천리는 활황세를 보이는 건축경기에 대응하기 위해 신당공장 옆 신당동 248-18번지에 <삼천리건축자재상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의 초기 실적은 비교적 준수한 편이었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해진 연탄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1962년 3월 폐업을 결정하고, 삼천리건축자재상사가 쓰던 2층 건물을 삼천리 본사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삼천리는 처음으로 독립된 본사 사무실을 보유하면서 본사 중심의 경영을 펼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