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이야기
삼천리 창립과
도시가스 사업 진출
1955 ~ 1992
- Section 1. ‘삼천리연탄기업사’ 창립과 성장기반 구축
- Section 2. 국내 최대 연탄 공급자로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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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3. 연탄 사업 수직계열화와 사업다각화
- 1. 기업공개와 경영체제 정비
- 2. 삼척탄좌 인수 ‘연탄 사업 수직계열화’
- 3. 에너지사업 확장을 위한 시도
- 4. 비에너지 분야에서의 신사업 모색
- Section 4. 삼천리그룹 여의도 시대의 개막
- Section 5. ‘친환경 에너지’ 도시가스 사업 진출
- Section 6. 연탄 사업의 축소 및 관계사의 성장
Section 3
연탄 사업 수직계열화와 사업다각화
1. 기업공개와 경영체제 정비
석유파동 이후 에너지 정책의 변화
우리나라는 1970년대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석탄을 기반으로 한 에너지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1966년의 주유종탄 정책에 힘입어 석유류 사용이 급증하기는 했지만, 석탄은 여전히 연료에너지로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는 석유가 제1의 에너지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석유는 석탄에 비해 열효율이 높고 취급이 용이하며 상대적으로 환경오염이 덜하다는 장점이 있어 빠른 속도로 석탄의 자리를 대체해 나갔다. 국내에서 석유가 생산되지는 않지만 정유공장이 잇달아 설립된 것도 석유소비를 촉진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1970년대에 발생한 두 차례의 석유파동은 우리나라 에너지산업 구조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1973년의 1차 석유파동은 국제유가의 급등을 불러오며 석유 수입 의존도가 높았던 한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1979년 발생한 2차 석유파동은 1차 석유파동 때보다 더 큰 충격을 안겨주며 한국 경제를 휘청이게 만들었다.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인해 물가도 급등했다.
두 번에 걸쳐 에너지 위기를 겪으면서 정부는 에너지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마련했다. 특히 에너지 다변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석탄, 원자력, 천연가스 등 비석유 에너지원의 개발에 주력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원자력발전소 건설이 본격적으로 추진돼 고리 1호기가 가동을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전 국민적인 에너지 절약 운동도 광범위하게 전개했다. 정부는 다양한 제도와 정책을 쏟아내며 가정과 산업체에서 에너지 사용을 자제하고 효율화하자고 강조했다. 기존의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도 폐기하고 주탄종유(主炭從油) 정책으로 전환했다. 정부는 석탄 증산을 장려하는 등 석탄산업 보호와 생산량 증대를 위한 지원 정책을 펼쳤다. 이는 연탄산업이 다시 호황을 맞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석탄산업의 호황 속에서도 장기적으로 석탄의 역할이 축소되리라는 것을 예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석유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정부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석유와 천연가스 의존도가 심화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기업공개 통해 ‘국민의 기업’으로
상호 변경 이후 삼천리는 기업공개 준비에 들어갔다.
삼천리가 기업공개를 결심한 것은 1975년 가을부터였다. 이 무렵 삼천리는 기업의 규모가 커지고 사업다각화에도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서 운영자금과 시설투자를 위한 자금을 추가로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기업의 위상에 걸맞도록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노력도 필요했다. 이 두 가지를 만족하려면 기업공개가 최선의 방안이라는 게 삼천리의 판단이었다.
때마침 정부는 1972년 12월 ‘기업공개촉진법’을 제정한 이후 기업공개를 독려하는 중이었다. 당시만 해도 기업공개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아 기업공개를 주저하는 기업들이 많았다.
삼천리는 정부 방침과는 상관없이 기업공개가 회사발전의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기업공개를 통해 더욱 투명하고 공정한 경영을 실현한다면 삼천리가 국민과 함께 성장하는 국민의 기업으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사업다각화를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원활하게 조달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삼천리는 약 8개월에 걸쳐 기업공개의 필요성, 경영에 미칠 영향, 정부 정책의 방향과 대책 등을 면밀하게 검토했다. 그리고 1976년 8월 14일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기업공개 방침을 의결하고, 같은 해 12월 3일 대신증권을 주간사로 선정하여 신주 공개모집 절차에 들어갔다.
공모 신주는 120만 주로, 액면가 500원에 30% 프리미엄을 붙인 1주당 650원, 총액 7억 8,000만 원(액면가 기준 6억 원)으로 결정되었다. 이 중 일반배정분 5억 4,600만 원에 대해 청약을 진행한 결과 4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삼천리 주식은 1976년 12월 23일 증권거래소에 상장돼 40원 상승한 690원으로 첫날 거래를 시작했다.
기업공개와 신주 공모를 진행한 결과 삼천리의 총 자본금은 15억 원으로 늘어났다. 삼천리는 1978년 6월 5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추가로 단행해 총자본금을 20억 원으로 늘렸다.
이장균 회장 취임
삼천리는 1970년대 들어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으며 에너지산업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직접 체험했다. 그 변화의 한복판에서 석탄산업의 사양화에 대비해 사업다각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과제를 안았다. 지속적인 임금 상승과 석탄연료 사용 감소 등 사업환경의 변화추이를 고려하면 사업다각화는 삼천리의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삼천리는 사업다각화를 경영의 핵심 과제로 삼아, 성장 가능성이 높고 국가적으로도 긴요한 산업 분야를 중심으로 신사업에 진출했다. 그 결과 삼천리의 사업 분야는 정밀기계, 무역, 건설, 레저 등으로 확대되었다.
사업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삼천리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며 경영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최고경영진을 새롭게 구성하기로 하고, 1978년 1월 1일 이장균 사장을 대표이사 회장으로 추대했다. 또 전문경영인이자 석탄 전문가인 인현철 부사장을 제3대 사장으로 선임해 연탄 사업에서도 시장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이장균 회장의 취임을 계기로 삼천리는 기업 체질개선과 인적 구조 고도화, 그리고 사업영역의 확장 등을 적극 추진했다. 나아가 인수 혹은 직접 설립한 계열사들과 함께 그룹 체제로 경영구조를 전환해 나가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이장균 회장 체제 아래에서 삼천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2. 삼척탄좌 인수 ‘연탄 사업 수직계열화’
국내 최대 탄광회사 삼척탄좌 인수
1970년 4월 15일 삼천리는 국내 최대의 민영 탄광회사 중 하나인 <삼척탄좌개발주식회사>를 인수해 기업 성장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삼척탄좌 인수는 삼천리가 석탄 채광에서부터 연탄 생산에 이르는 연탄 사업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였다.
삼척탄좌는 1962년 12월 10일 설립된 탄좌 개발 회사이다. 보험업을 주력으로 하는 대한생명그룹이 설립했다. 설립 당시는 급증하는 석탄 수요에 비해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해 국가적으로 탄광 개발이 시급한 실정이었다.
정부는 탄광 개발과 석탄 증산을 위해 1962년 1월 ‘석탄 개발 임시조치법’을 공포했다. 이 법은 일정 구역 내의 군소 광업권자들이 각자 소유한 매장량만큼의 주주로 참여하여 대형 탄좌 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았다. 탄좌 개발 회사의 대형화를 통해 석탄공급을 늘리겠다는 뜻이었다. 이 법에 따라 1962년 4월 24일 삼척탄좌와 동원탄좌가 처음으로 탄좌로 지정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 10일 설립 절차를 마무리한 삼척탄좌는 1963년 4월 시험 생산한 원탄부터 생산량 전체를 삼천리에 공급하며 국내 굴지의 민영 탄광으로 성장했다. 삼척탄좌의 주 사업장인 정암광업소는 총면적 3,678ha의 대형 광산으로, 강원도 정선군, 삼척군, 영월군의 함백산·태백산 능선에 위치해 있었다. 총 매장량도 예상치 기준으로 9,375만 톤에 달했고, 탄질도 매우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1964년부터 상업채광이 이루어졌는데, 생산첫해에 12만 7천 톤의 무연탄을 생산한 후 매년 생산량을 늘려서 1969년에는 약 50만 톤을 생산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1966년에 발생한 연탄파동과 뒤이은 정부의 에너지 정책 변경에 따른 영향으로 1960년대 말 경영난에 봉착했다. 더욱이 모기업인 대한생명도 무리한 투자로 인해 부실화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어서 계열사 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결국 대한생명은 삼척탄좌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공개매각을 검토하던 대한생명은 얼마 후 방침을 바꿔 삼천리에 인수를 제의해 왔다. 삼척탄좌출범 초기부터 삼척탄좌의 무연탄 전량을 구매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삼천리는, 우수한 원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여 연탄 사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기회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삼척탄좌 인수를 결정했다. 이문공장을 건설하고 각 공장의 설비를 증설하느라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았지만, 유성연 당시 사장이 지인의 도움을 받고 이장균 당시 부사장도 자신의 집까지 처분해가며 인수자금을 마련했다.
삼천리는 1970년 4월 15일 대한생명과 총주식의 60%를 9억 원에 인수한다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하고 삼척탄좌를 인수했다. 국내 굴지의 민영 탄광회사인 삼척탄좌를 인수함으로써 삼천리는 회사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를 맞게 되었다. 특히 오랜 염원이었던 ‘안정적인 원탄 확보’의 꿈을 실현함으로써 고속 성장의 길을 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생산성 향상 및 복지 증진
인수 당시 삼척탄좌는 연간 60만 톤을 생산하는 무연탄광으로, 17개 광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자산평가액은 약 15억 원, 임직원 수는 삼천리보다 무려 6배나 많은 3,000명에 달했다. 삼천리가 국내 최대 규모의 대형 탄광회사를 인수하자 업계에서는 우리나라 석탄 산업사에 남을 획기적인 사건이라며 “다윗이 골리앗을 눌렀다”는 등의 표현으로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인수와 동시에 유성연 선대회장이 삼척탄좌의 새 회장으로 취임했다. 최형순 사장을 비롯한 기존의 경영진과 임직원은 모두 유임토록 했다. 고용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높여 생산성 향상에 역량을 모으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삼척탄좌를 인수하면서 삼천리의 가장 큰 관심은 생산성 향상에 있었다. 전 임직원의 고용을 승계한 것도, 생산설비를 현대화하고 직원들의 근무환경 개선에 주력한 것도 광원들의 근무 의욕을 고취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안전사고 예방 교육을 강화하고 안전시설을 확충하는 등 안전관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생산성 향상을 위한 방안의 하나로 삼천리는 임직원의 복지 향상에 많은 공을 들였다. 육체노동의 강도가 높은 직원들에게 균형 잡힌 영양을 공급하고자 1975년부터 전 직원에게 우유를 제공한 것은 삼천리의 섬세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주거환경이 열악한 직원들에게 당시에는 생소했던 단열재를 사용한 사택을 지어 제공한 것은 인근 탄광의 직원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 밖에도 광원들의 고리채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광업소 내에 마을금고를 운영하고, 1975년에는 국내 최초로 광원 휴식용 여름휴양소를 개설하는가 하면, 통근버스 운영, 연탄과 근무복 무상 지급, 김장 보조금 지급 등 다양한 복지제도를 시행했다. 1975년 정부와 공동으로 출연해 설립한 석탄장학회는 매년 수백 명의 임직원자녀들이 배움을 계속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광부들에게 준 세 가지 약속
어떤 기업을 인수할 때는 피인수 기업에 대한 경영권을 강화하고 조직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 주요 임직원을 해임하고 새로운 인력을 파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삼천리는 삼척탄좌를 인수하면서 삼척탄좌의 기존 경영진과 임직원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직장의 안정성이 생산성 제고의 첫걸음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뿐만 아니라 직원들에게 다음의 세 가지를 약속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 약속은 석탄업계뿐 아니라 타 업계에서도 보기 드문 것이어서 큰 화제가 되었다.
첫째, 어떤 상황에서도 급여는 반드시 정해진 날짜에 현금으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국내 석탄업계는 정부의 주유종탄 정책으로 인해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는 중이었다. 경영난으로 인해 급여를 제때 지급하지 못하거나 현금 대신 현물로 주는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삼천리는 직원들의 생활 안정을 최우선으로 보장하기 위해 급여의 현금 지급을 약속했다.
둘째, 탄광의 작업시설을 현대화하고 복리후생시설을 타 탄광과 비교해 뒤처지지 않도록 정비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민영 탄광회사들의 복지 수준은 매우 열악했다. 자연히 광원들의 이직률도 높았다. 삼천리는 광원들이 자부심과 애정을 가지고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근무 환경과 복지 개선에 힘쓸 것을 강조했다.
셋째, 사내 소비조합을 운영하여 생활필수품을 저렴하게 공급하고 지역사회의 물가를 낮추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대부분의 탄광은 산간 지역에 자리 잡고 있고, 주민들도 일자리를 찾아 일시적으로 머무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지역 물가는 비싸고, 그나마도 필요한 물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삼천리는 광부들이 생활의 안정을 느끼며 직장에 더 큰 애정을 가질 수 있도록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세 가지 약속에 대해 광부들은 반신반의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전까지 누구도 이런 약속을 하지 않았고 실현 가능성도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약속들은 하나하나 성실하게 이행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직원들이 삼천리의 진심을 믿게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직장에 대한 애정과 신뢰는 삼척탄좌의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수갱 건설 착수 및 생산실적 증가
삼천리는 삼척탄좌의 생산성 향상을 위해 시설투자를 크게 늘렸다. 특히 1972년 10월 준공한 운탄집약(運炭集約)시설은 운탄비 절감과 공해 예방, 작업환경 개선에 기여하며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인수 이후 1978년까지 투입한 시설투자비만 해도 132억 원에 달했다. 삼척탄좌가 창립 후 삼천리에 인수되던 1969년까지 시설투자에 투입한 자금이 총 6억 원 정도인 것과 비교하면 무려 20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시설투자에 주력한 결과 1970년에 60만 톤이던 연간 생산량은 1971년 73만 톤, 1972년 80만 톤, 1974년 96만 톤 등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1975년에는 처음으로 100만 톤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고, 1978년에는 122만톤을 생산해 역대 최대 생산량의 신기록을 세웠다. 주목할 점은, 인수 직후부터 심부(深部)탄광 개발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삼척탄좌의 개발 구역은 태백산맥에 위치한 고산지대로, 해발 1,400~850m 수준에서 채탄하는 지상탄 개발, 850~300m 수준에서 채탄하는 심부탄 개발로 나뉘었다. 당시에는 적은 비용으로 채탄이 가능한 지상탄 개발에 집중하였으나, 지상탄 채탄이 마지막 단계에 다다르고 있어 지속적인 채탄을 위해서는 심부탄 개발을 서둘러 준비해야 했다.
삼척탄좌는 1단계 수평갱도, 2단계 사갱, 3단계 수갱 등 3단계로 나누어 심부탄 광구 개발을 진행했다. 설립 초기부터 시행된 1단계는 1970년대 중반에, 2단계는 1970년대 초 개발에 착수하여 1980년대 중반에 종료될 것으로 예상하고, 3단계인 수갱에 대해서도 언제든 개발에 착수할 수 있도록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삼척탄좌는 해발 850~750m 수준까지는 이미 시설된 사갱 방식에 의해 채탄을 실시하고, 해발 700m 이하에 대해서는 수갱 시설을 설치하여 채탄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정암광업소의 제1수갱은 1981년 5월 준공했다. 해발 832m에 조성된 중앙 뜰에 높이 53m에 달하는 철탑을 세우고, 지하를 향해 수직으로 582m의 수갱을 원통형으로 파 내려가 해발 250m 지점에 도달하도록 건설했다. 건설비는 총 120억 원이 투입되었다. 수갱 건설을 통한 예상 채탄량은 월 12만 톤이었다.
각종 시설투자와 환경 개선에 소요되는 예산을 충당하기 위해 삼척탄좌는 1973년 11월과 1976년 12월 두차례에 걸쳐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그 결과 1978년 말에는 자본금이 22억 2,000만 원으로 늘어났다.
삼척탄좌는 탄광 개발 및 석탄 증산을 통해 에너지산업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8년 3월 유성연 선대회장이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한 것을 비롯해 모두 일곱 차례의 산업훈장, 두 차례의 포장, 여섯 차례의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3. 에너지사업 확장을 위한 시도
기계공업의 필수 연료 코크스 사업 진출
삼천리는 1970년 삼척탄좌를 인수해 기존에 해오던 연탄사업을 석탄 사업으로 확장했다. 이를 계기로 ‘연탄 제조업체’의 한계를 뛰어넘어 ‘종합에너지기업’으로 도약한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당시 국가 전체의 에너지원 구성을 보면 석탄이 여전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석유의 비중이 빠르게 높아지고 있고 석탄의 환경오염 문제가 대두되고 있어 머지않아 연탄이 사양화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었다. 삼천리가 사업다각화를 모색한 가장 큰 이유였다.
삼천리가 구상하는 사업다각화는 크게 두 갈래였다. 하나는 석탄사업에서 연관 에너지 분야로 보폭을 확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에너지 외의 분야에서 신사업을 찾아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는 것이었다.
에너지사업의 확장을 위해 삼천리가 먼저 시도한 것은 코크스(Coke) 사업이었다. 코크스는 석탄을 원료로 하여 만드는 골탄(骨炭) 또는 해탄(骸炭)이라 부르는 연료를 말한다. 삼천리는 코크스가 기계공업의 핵심 분야인 주물공업에 연료로 쓰인다는 점에 착안하여 코크스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코크스는 국가 차원에서도 수요가 증가하고 있어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었다. 삼천리는 1974년 10월 기획부를 신설하고 본격적으로 코크스사업에 들어갔다.
코크스공장 부지로 처음 낙점한 곳은 인천시 북구 부개동이었다. 그러나 이미 준공업지역으로 지목(地目)이 설정돼 있어 공장 건설 허가를 받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 다음에는 충남 성환에 공장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경쟁업체의 방해 등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결국 코크스공장은 성환보다 조금 더 남쪽인 충남 천원군 직산면(지금의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모시리 90번지로 결정되었다.
삼천리는 82,645㎡(25,004평)의 부지를 매입해 1976년 3월 1일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그리고 착공 약 8개월 만인 1976년 11월 7일 준공한 후 2주일간의 시험가동을 거쳐 11월 21일 상업생산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7년에는 정선시설 1기와 화로 2기, 건조기, 핀크러셔, 성형기 각 1기의 설비를 증설하고 컨베이어 시스템을 설치하는 등 공장을 확장했다.
코크스 사업의 초기 실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후발 기업으로서 시장 진입에 어려움을 겪었고 고객사인 주물공장들과의 단가 조정에도 애를 먹었다. 그러나 생산수율 제고와 시장 개척에 노력하는 한편, 주물공장과의 직거래 대신 판매대리점 제도를 채택하는 영업전략을 전개하면서 실적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공장 가동 첫해에 710톤에 불과하던 판매실적은 1977년 2만 5,000톤, 1978년 3만 4,000톤으로 증가했다. 1978년에는 철도청에서 사용하는 관수용 코크스를 전량 납품하기로 계약을 체결하고,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에 수출도 성사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코크스공장은 연구개발에 투자를 확대하여 원가절감과 공정개선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이루었다. 특히 1980년부터 원가절감을 위해 추진한 ‘코크스 원료의 대체 및 배합비율 개선’ 과제는 1982년 초 대체원료 개발 성공으로 이어지면서 원가절감에 큰 역할을 했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1981년에는 처음으로 4,300만 원의 수익을 창출하며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최초의 지방 연탄공장 직산공장 가동
1978년 6월 16일 삼천리는 직산 코크스공장 내에 연탄공장을 준공했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 세운 최초의 연탄공장이었다. 직산연탄공장은 천안시, 온양군, 천원군 등 충남 북부 지역에 삼천리연탄을 공급했다. 이는 서울을 벗어나 전국 각지에 삼천리연탄의 브랜드를 알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직산 연탄공장은 가동 첫 해인 1978년에 7만 4천톤의 연탄을 생산했다. 이듬해부터는 매년 13〜15만 톤의생산 실적을 기록했다. 삼천리는 천안시 중심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공급 지역이 연탄 수요가 많지 않은 농촌지역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여 주 연료를 연탄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하고 연탄보일러 사용을 권장하는 홍보활동을 벌이며 수요처를 개발해 나갔다. 비수기인 여름철수요 개발을 위해 지역 특산농산물인 담뱃잎과 고추 건조에 연탄을 사용하도록 홍보하기도 했다.
한편, 1980년대 초 삼천리는 새로운 에너지사업의 하나로 수입 갈탄 판매사업을 시작했다. 갈탄은 연탄에 비해 발화온도가 낮고 완전연소에 가깝게 처리되기 때문에 타고 남은 재의 양이 극소량이고 아황산가스 농도도 낮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삼천리는 1978년부터 중견 수출입 회사인 삼화와 함께 호주의 갈탄 탄광을 시찰하고 호주산 성형갈탄 시제품을 들여와 연소시험을 실시하는 등 다각도로 시장성을 확인했다. 그리고 삼화가 경영난으로 투자 능력을 상실함에 따라 독자 사업으로 전환하여 1980년 호주와 독일에서 갈탄을 수입해 가정용·학교용·산업용으로 판매했다.
그러나 에너지사업의 확장을 목표로 추진한 갈탄사업은 석탄산업의 사양화 추세 속에서 수요처를 찾기가 어려워지면서 사업이 어려워졌다. 이에 삼천리는 1987년 갈탄 사업에서 철수했다. 사업에서는 철수했지만, 연료사업의 경험을 축적한 것은 그 후 에너지사업을 확장하는 데 유의미한 자산이 되었다.
4. 비에너지 분야에서의 신사업 모색
<삼천리기계> 설립, 기계공업의 새 지평 개척
삼천리의 사업다각화는 크게 에너지 부문과 비(非)에너지 부문 두 축으로 추진되었다. 에너지 부문에서는 1970년 삼척탄좌를 인수하면서 원탄 생산 분야로 확장하여 종합에너지기업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비에너지 분야에서는 국가 경제발전에도 기여하고 삼천리의 성장에도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기계공업, 무역, 건설 등의 사업을 시도하며 가능성을 탐색했다.
그중 기계공업은 삼천리의 사업다각화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된 사업이라 할 수 있다. 1967년 4월 연탄 제탄기와 부품을 자체 생산하기 위해 설립한 삼진기공이 그 출발점이었다. 삼진기공은 1970년 1월 삼천리에 일시 통합되기도 했으나, 1974년 12월 1일 별도 법인 <삼천리기계공업주식회사>로 독립하며 독자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초대 임원진으로는 회장 유성연, 사장 이장균, 전무 이삼석, 상무 강영철, 이사 박유성, 감사 인현철이 선임되었다. 자본금은 5억 3,000만 원이었다.
삼천리기계는 뛰어난 기술력으로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69년에 이미 제탄용 소형윤전기 개발에 성공하여 제작을 시작했고, 1972년에는 일반산업용 기계 제작에도 착수했다.
삼천리기계는 생산설비를 확충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법인 설립 전인 1973년 2월에 제1주물공장을, 12월에는 제2주물공장을 건설하여 사업기반을 구축했고, 법인 설립 직후인 1975년 12월에는 염창동 부지 내에 열처리공장을, 1977년 6월에는 정밀기계공장을 준공해 기계공업의 지평을 넓혔다.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계속했다. 1975년 7월 일본의 북천철공소와 기술제휴를 맺고 정밀기계 기술을 도입한 것을 비롯해, 1976년 7월에는 일본원공업과, 1976년 9월에는 일본 오리엔탈엔지니어링과 잇달아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하며 선진기술을 도입했다. 또 1978년 10월에는 다시 일본 북천철공소로부터 다이렉트 마운트형 선반 척 제조 기술을, 1980년 11월에는 일본공업로에서 공업용 연소로 기술을 도입하는 등 기술 확보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 결과 1970년대 중반 무렵 삼천리기계는 산업용 기계와 채광기계, 선광기계, 운반기계, 플랜트 설비, 금속 열처리로 등의 기기를 제작할 만큼 기술력이 좋아졌다. 이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그동안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선반 척, 드릴 척, 벤치 드릴링 머신, 태핑 머신 등 정밀기계 제품까지 생산하는 데 성공하여 국내 기업뿐 아니라 동남아 지역으로 수출하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어냈다.
삼천리기계는 각종 광산 설비, 운반기계, 주물 제품을 생산해 대기업 등에 납품하는 한편, 1977년부터는 타이어 플랜트, 코크스 플랜트, 생석회 플랜트, 항만하역 플랜트 등 플랜트 분야에도 진출하여 기계류 전문기업으로 그 입지를 굳혀나갔다.
열처리 전문회사 <삼천리열처리> 설립
기계사업이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한 삼천리는 한 걸음 더 전진하여 열처리 분야에 진출하기로 했다. 열처리(Heat Treatment)란 금속의 조직을 변화시켜서 금속 부품 또는 공구를 사용할 때 필요로 하는 기계적 성질을 얻기 위해 행하는 가열 및 냉각 과정을 말한다. 철강재료를 열처리하면 열처리하는 방식에 따라 기계적 성질이 개선돼 다양한 분야에서 공업적으로 널리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삼천리는 삼천리기계가 생산하는 정밀기계부품의 품질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열처리 공정의 전문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1977년 초 생산을 시작한 적주식 침탄로 방식의 열처리로의 판매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열처리 전문회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국가적으로도 기계공업의 질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고도의 열처리 기술을 가진 열처리 전문회사의 설립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국내에는 한국열처리를 비롯해 20여 개의 열처리 회사가 있었지만, 대부분 수동 담금질 수준에 그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삼천리의 열처리 기술은 우리나라 기계공업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삼천리기계는 일본 유수의 열처리 전문기업인 오리엔탈엔지니어링사에서 열처리로 제작 기술을 도입해 적주식 침탄로 형태의 열처리로를 생산할 만큼 높은 기술력을 확보한 상태였다.
삼천리는 1977년 6월 16일 열처리 전문회사 <삼천리열처리공업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공장 부지를 마련하고, 삼천리기계가 최초로 생산한 침탄식 열처리로 2기를 구매해 공장에 설치했다. 또 삼천리기계가 보유하고 있던 소형 열처리로 1기도 인수해 사업 채비를 갖추었다.
서울에 열처리공장을 설립한 삼천리열처리는 국가 기간산업인 기계공업의 발전을 촉진한다는 취지에서 부산에도 열처리 전문회사를 세우기로 했다. 마침 정부가 부산의 사상공단을 기계공업 중심 공단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힌 터여서 부산에도 수준 높은 열처리 회사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1978년 삼천리는 사상기계공단 내 사상구 삼락동 353-5번지에 <삼흥열처리공업사>를 추가로 설립해 부산권역에서도 열처리 사업을 시작했다.
<미성상사> 인수 통한 무역업 도전
우리나라가 1960년대 이후 괄목할 만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수출의 힘이 컸다. 정부는 수출이 경제에 활력을 줄 것으로 보고, “수출만이 살 길”이라며 수출 증대를 위해 국력을 결집하고자 했다. 1970년대에는 수출입국(輸出立國)의 기치를 내걸고 수출기업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제공하며 적극적으로 수출을 독려했다. 종합무역상사 제도도 수출 극대화를 위한 방안 중 하나였다.
삼천리도 내부적으로 진지하게 무역업 진출을 검토했다. 삼천리연탄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업이 내수시장에 한정돼 있어 해외시장을 개척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가발 수출을 전문으로 하는 ‘미성가발양행’이라는 회사가 삼천리에 인수를 제의해 왔다. 1967년 설립된 이 회사는 오로지 가발 수출에 집중하여 서울통상, 반도상사, YH무역 등과 함께 대표적인 가발 수출업체로 성장한 회사였다. 당시 가발은 주요한 수출 주력 품목 가운데 하나였다. 1960년대에는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10%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컸다. 1970년대 들어와 세계시장의 수요가 감소하고 동남아 국가들의 저가상품이 출현하면서 다소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여전히 가발은 중요한 수출 품목 가운데 하나였다.
삼천리는 미성가발양행을 인수하기로 했다. 이 회사를 통해 무역 경험을 쌓고 또 해외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한다면 다른 사업들이 앞으로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삼천리는 미성가발양행의 해외영업망을 삼천리의 수출입 창구로 활용하는 동시에 이 회사를 장차 종합무역상사로 육성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1972년 2월 미성가발양행을 인수했다. 인수 즉시 사명을 <미성상사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유성연 선대회장이 대표이사 회장으로 취임했다.
인수 이후에는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세 차례 연속 증자를 실시해 자본금을 2억 9천만 원으로 늘렸다. 수산물과 가방을 수출 주력상품으로 추가하고 관련 공장을 인수하는 등 수출 품목도 다양화했다. 1973년 4월에는 미국 뉴욕에 지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삼천리 역사상 최초의 해외 거점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인수 이듬해인 1973년 발생한 석유파동으로 세계 경기가 침체하면서 미성상사의 성장전략에도 차질이 생겼다. 채산성이 떨어진 수산물과 가방의 수출은 중단되었고 종합무역상사로 도약하려던 계획도 사실상 물거품이 되었다. 그나마 경쟁력이 있는 가발 수출만이 석유파동의 파고 속에서도 제 몫을 했다.
미성상사는 전략을 바꿔 가발 수출에 주력하기로 했다. 그 대신 국내 최고의 가발 전문업체로 자리매김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대지 1,812㎡(548평), 연면적 3,676㎡(1,112평)의 4층 건물을 매입해 본사 사옥 및 공장으로 활용했다. 비록 종합무역상사를 향한 꿈은 접었지만 가발 전문업체로 방향을 재정립하여 새롭게 출발한 미성상사는 1970년대 말 가발 생산업계 선두에 올라서며 국내 대표 가발수출업체로 이름을 알렸다.
<삼천리주택> 설립, 주택건설 사업 진출
1970년대는 인구가 급증하고 경제개발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그 영향으로 대규모 주택건설 사업이 활기를 띠었다. 특히 1978년 정부가 국민의 주거환경 개선을 국가 역점사업으로 선정하고 추진함에 따라 주택건설 사업은 과열 양상을 보일 만큼 활발해졌다.
삼천리는 사업다각화의 일환으로 주택건설업에 진출하기로 하고, 1978년 2월 회사 정관의 사업목적에 ‘주택건설 사업’을 추가했다. 그리고 시험적으로 서울시 구로구 시흥동에 소규모의 연립주택을 건설·분양하는 사업을 벌였다. 시험사업 시행 이후에는 사내에 개발실을 설치하여 주택사업 진출의 타당성을 최종 점검했다. 창립 이후 줄곧 에너지사업에만 전념해 온 삼천리가 새로운 사업 분야인 건설업에 도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충분히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개발실은 1979년부터 약 1년 동안 별도의 실무팀을 두고 사업의 타당성을 검토했다. 동시에 52가구 규모의 공동주택을 건설하여 시험 분양하며 주택사업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내외의 리스크까지도 다양하게 점검했다. 이를 통해 개발실은 정부의 강력한 주택건설 정책, 삼척탄좌 사택 건설의 필요성, 향후 수도권 주거지역 확대에 따른 건설경기의 장래성 등을 집중적으로 검토한 후 건설업에 진출하는 것은 사업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삼천리는 1980년 4월 21일 자본금 2,000만 원으로 <주식회사 삼천리주택>을 설립했다. 임원진은 사장 홍동식, 이사 구회봉·박정용, 감사 정우진 등이었다. 삼천리주택은 1982년 2월 성일건설로부터 종합건설업 면허를 양도받아 주택건설 사업 시행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서울 관악구 낙성대 인근의 연립주택 공사를 비롯해 1982년 3월에는 삼척탄좌 정암광업소의 삼봉주택 등 관계사들의 사택과 사옥 건설 등을 수주하며 본격적인 주택사업의 여정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