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이야기
삼천리 창립과
도시가스 사업 진출
1955 ~ 1992
- Section 1. ‘삼천리연탄기업사’ 창립과 성장기반 구축
- Section 2. 국내 최대 연탄 공급자로의 성장
- Section 3. 연탄 사업 수직계열화와 사업다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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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4. 삼천리그룹 여의도 시대의 개막
- 1. 여의도 신사옥으로의 신축 이전
- 2. ㈜삼천리 상호 변경과 그룹 체제로의 전환
- 3. 사회공헌활동의 본격 전개
- Section 5. ‘친환경 에너지’ 도시가스 사업 진출
- Section 6. 연탄 사업의 축소 및 관계사의 성장
Section 4
삼천리그룹 여의도 시대의 개막
1. 여의도 신사옥으로의 신축 이전
경제 중심지 여의도에 사옥 신축
삼천리는 1983년 6월 15일 여의도 사옥을 준공하고 본사를 이전했다. 이에 따라 삼천리는 ‘여의도 사옥 시대’를 열게 되었다.
삼천리가 여의도로 사옥을 이전하고자 처음 계획했던 것은 197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날로 사세가 확장하는 가운데 구성원의 수가 늘어나 당시 사용하던 충무로 사옥만으로는 효율적으로 근무하기가 어려워졌다. 삼천리는 사세 확장에 부응하고 경영관리의 효율화를 기하기 위해 여의도 사옥 건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당시 여의도는 정부가 추진한 여의도 종합개발 계획에 따라 대규모 개발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전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섬으로 단순한 농경지에 불과했으나, 대규모의 토지 매립 공사를 시행하고 여의도광장과 국회의사당 건설이 시작되는 등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관심이 집중되었다. 정부와 서울시는 여의도를 정치와 금융, 경제의 중심지로 조성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증권거래소를 비롯한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이전을 유도했다.
이에 삼천리는 경제 중심지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여의도에 터전을 잡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75년 1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1번지 2,159㎡(653평) 규모의 대지를 매입했다.
그러나 부지를 매입한 후에도 곧바로 건설공사를 시작하지 못했다. 당시 추진 중이던 충남 천안의 직산 코크스공장 건설공사에 예상보다 많은 자금이 소요돼 자금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삼천리는 사옥 신축 계획을 연기하고, 1975년 12월 중구 필동1가 3-3번지 서울빌딩을 최초의 자체 사옥으로 매입해 본사 사무실로 사용했다. 매입 후 이 건물의 이름은 삼천리빌딩으로 바꾸었다.
그로부터 5년여가 지난 1980년 10월, 삼천리는 다시 여의도 사옥 신축 작업에 착수했다. 1981년 5월 8일 열린 이사회에서 사옥 신축 계획안을 의결했다. 신축 건물의 전체 규모는 지하 2층, 지상 10층, 연면적 1만 744㎡(3,250평)로 정해졌다. 건물 층수를 10층으로 비교적 낮게 잡은 것은 인접한 한국방송공사(KBS) TV 방송의 주파수대역 문제로 고도 제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초에는 자금 사정을 고려해 1차로 지하 2층, 지상 5층 규모로 건설한 후 다시 2차 공사에 들어간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건설기술상 문제가 있다고 판단돼 한 번에 일괄하여 건설하기로 했다.
삼천리는 1981년 5월 13일 원도시건축연구소와 설계용역 계약을 체결하고 6월 2일에는 영진지하개발과 지질조사 용역계약을 체결하여 본격적인 사옥 건설에 들어갔다. 8월 14일에는 사옥 신축 업무를 담당할 사옥건설본부도 설치했다. 이어 1981년 8월 27일 태영개발과 굴토공사 계약을 체결한 삼천리는 9월 1일 착공식을 갖고 건설공사에 들어갔다.
여의도 삼천리빌딩은 착공 2년 9개월 만인 1983년 6월 15일 준공되었다. 그리고 7월에는 삼천리산업과 삼척탄좌를 시작으로 관계사 대부분이 입주를 완료했다. 이에 따라 주요 관계사들이 한 건물에 모인 가운데 삼천리의 여의도시대가 그 막을 올리게 되었다. 특히 삼천리산업과 삼척탄좌가 처음으로 한 건물에 입주하게 됨으로써 시너지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두 창업자 우정 담은 TV 드라마 ‘열망’
여의도 사옥을 준공하고 반년이 지난 1984년 1월 10일, 삼천리는 을지로 저탄장에서부터 여의도 시대에 이르기까지 28년의 여정을 담은 <삼천리산업사>를 발간했다. 이 책은 창업에서 삼천리그룹을 일구기까지 이장균 선대회장과 유성연 선대회장의 일대기를 비롯해 두 창업자의 창업 철학, 삼천리 28년의 역사 등을 담아 ‘성공적인 동업’의 가치와 열정을 자세하게 조명했다.
이 무렵 두 창업자의 창업과 기업 성장 과정을 담은 이야기가 지상파 TV 드라마로 제작돼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KBS 2TV가 1985년 1월 5일부터 1985년 9월 29일까지 78부작으로 방영한 주말드라마 “열망”이 그것이다. 황은진 PD가 연출하고 이재우 작가가 집필한 이 드라마는, 삼천리의 두 창업주 유성연·이장균 선대회장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삼천리를 일궈온 과정을 비롯해, 두 사람의 우정, 인간애, 그리고 맨땅에서 기업을 일궈낸 열정과 기업가정신을 조명해 시청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제작진은 두 창업자의 일생이 보여준 일관된 정열과 노력을 통해 우리의 참모습을 조감해 보고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좌표를 제시한다는 취지에서 드라마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국영방송인 KBS가 한 기업의 창업 스토리와 기업가정신을 소재로 주말 황금시간대에 드라마를 방송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두 창업자가 보여준 시련과 극복, 도전의 이야기가 많은 국민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소재였던 것이다. 이 드라마는 당시 일부 기업의 부도덕한 행태로 인해 많은 국민이 가지고 있던 기업 및 기업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불식하고 건강한 기업관을 갖게 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드라마로 승화된 ‘두 창업자 이야기’
KBS2-TV가 1985년 1월 5일부터 9월까지 78부작으로 방영한 주말드라마 “열망”은 지금까지도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아 있다.
“열망”은 삼천리의 두 창업자 유성연·이장균 회장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삼천리를 일구어온 과정을 그린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는 두 창업자의 변함없는 우정과 철저한 기업가정신을 집중 조명하여, 당시 팽배해 있던 기업인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우호적인 분위기로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국영방송인 KBS가 당시만 해도 대기업이라 하기 어려운 작은 기업의 창업 스토리와 창업정신을 소재로 삼아 주말 황금시간대에 장편 드라마로 편성했다는 점이다. 더욱이 두 창업자의 이름은 물론 기업 이름까지 실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만큼 두 창업자가 보여준 시련과 극복, 도전의 이야기가 타기업은 물론 일반 국민들에게도 폭넓은 공감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KBS가 두 창업자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제작한 것은 1984년 3월 20일 제21회 상공인의 날에 이장균 회장이 정부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훈장 수훈 직후 한 텔레비전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삼천리의 창업과 발전 과정을 진솔하게 들려주었는데, 이때 들려준 도전과 열정의 창업정신,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는 기업철학, 그리고 40년 동안 이어 온 유성연 회장과의 남다른 우정 이야기가 시청자들의 큰 공감을 얻었다. 이에 방송사 경영진에서 “삼천리 두 창업자의 우정과 투명하고 건전한 기업인의 모습을 드라마로 제작해 일부 기업들에게 경종을 울리자”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처음 드라마 제작 제의를 받았을 때 유성연·이장균 회장은 “그저 할 일을 했을 뿐 조금도 내세울 게 없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하지만 거듭되는 권유를 더 이상 뿌리치기 어려워 “사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드라마 제작을 허락했다.
시청자의 큰 호응 속에 드라마가 종영된 후, 시청자뿐 아니라 드라마 제작에 참여한 작가와 출연진, 제작진들까지도 큰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그들은 드라마 “열망”을 통해 ‘삼천리’라는 기업을 다시 보게 되었고, 대한민국의 기업과 그 기업들이 가야 할 길을 함께 보았다고 밝혔다. 이장균 회장 역을 맡은 임동진 배우와 유성연 회장 역을 맡은 이순재 배우 또한 “형제간의 주도권 싸움으로 기업윤리가 흐려지기도 하는 요즘에, 기업인의 모럴을 보여주는 현대인의 지표요 모범이 아닐 수 없다”는 감회를 밝혔다.
드라마 “열망”의 주제가도 화제가 되었다. 조용필이 부른 “열망”의 주제가는 바로 ‘친구여’이다. 이 노래는 지금까지도 널리 불리는 한국인의 애창곡 중에 하나가 되었다. 노래의 가사에는 삼천리 창업자 두 사람의 우정과 열망이 그대로 녹아 있다.
2. ㈜삼천리 상호 변경과 그룹 체제로의 전환
<㈜삼천리>로의 상호 변경
여의도 시대를 열었다는 것은 단순히 본사 사옥을 이전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삼천리는 여의도 사옥 시대를 맞아 회사 전체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자 했다.
먼저, 1984년 10월 15일 상호를 삼천리산업주식회사에서 <주식회사 삼천리>로 변경했다. 1955년 창립 당시 삼천리연탄기업사에서 1966년 삼천리연탄주식회사, 1973년 삼천리산업주식회사로 변경한 후 네 번째 이름으로 새롭게 단장한 것이다. 새 상호에는 사업영역의 확대를 포함해 새로운 경영환경에 부응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되었다.
이 무렵 삼천리는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경영환경에 놓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정용 연료의 질적 변화가 매우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1981년에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정부가 강력한 환경오염 방지 정책을 시행하며 서울에서부터 연탄 사용을 적극 억제하고 나선 요인이 가장 컸다. 이는 삼천리에게는 회사의 사활이 걸릴 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삼천리는 조속히 연탄 중심의 사업구조에서 벗어나 다양한 비즈니스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구축할 수 있도록 사업다각화 전략에 속도를 내야 했다. 그러자면 상호에 굳이 ‘산업’이라는 구체화된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다양한 사업, 다양한 변화를 추구하자면 ‘산업’이라는 용어의 굴레에 얽매일 수 없다는 뜻이었다. 더욱이 1982년에 경인도시가스를 인수하며 도시가스 사업에 진출함에 따라 종합에너지기업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상호에 담을 필요가 있었다.
한편, 상호 변경을 단행한 삼천리는 1985년 10월 1일 창립 30주년을 맞아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한다는 취지에서 사가(社歌)도 새로 제정했다. 이장균 사장이 직접 가사를 쓰고 작곡가 김동진이 곡을 붙인 새 사가에는, 삼천리가 한국의 대표기업으로서 세계로 뻗어나가는 기상과, 가정과 직장이 하나가 되어 발전하려는 ‘가정애·직장애’의 사시(社是) 정신을 담았다.
사업본부제 도입 통한 ‘책임경영’ 제도화
여의도 시대의 삼천리는 상호 변경으로 회사의 외양만 바꾼 것이 아니라 경영의 체계와 운영 방식도 혁신적으로 바꾸었다. 1978년에 인현철 부사장을 제3대 사장으로 선임하여 전문경영인 시대를 개막한 바 있는 삼천리는, 도시가스 사업 진출을 계기로 1985년 1월에는 사업본부제를 도입했다. 사업본부제는 책임경영을 제도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변화였다.
창업 이래 연탄 사업을 중심으로 사업을 영위해 온 삼천리는 새로운 사업영역인 도시가스 분야에 진출하면서 담당 인력의 대부분을 외부에서 충원했다. 따라서 사업의 성과 제고를 위해서는 책임경영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 실질적인 방안이 바로 사업본부제였다.
사업본부제 도입에 따라 삼천리의 조직은 연탄사업본부, 도시가스사업본부, 코크스사업본부, 그리고 관리본부 등 4본부 체제로 개편되었다. 삼천리는 1985년 2월 7일 각 본부의 대표이사를 선임하여 사업 분야별로 각각의 대표이사 책임 아래 사업의 성과와 효율성을 높일 수 있도록 했다. 이듬해인 1986년 4월 1일에는 무역사업본부가 추가로 신설돼 사업본부는 모두 5개로 늘어났고, 1991년에는 활성탄소 사업을 추진하면서 코크스사업본부를 화학사업본부로 개편했다.
한편, 이보다 앞선 1984년 삼천리는 정보화 시스템을 통해 업무의 합리화와 효율화를 추구하기로 하고 본사에 전산실을 설치했다. 1981년 8월 마이크로컴퓨터를 확보해 원재료 관리 업무를 전산화하면서 시작한 전산화 구축 작업은 이때부터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2메가급 컴퓨터로 새마을금고 출자금 관리와 급여업무를 처리하는 것으로 시작해 경리, 회계처리, 판매 및 시설자재관리 등의 업무가 잇달아 전산화되었고, 1986년에는 예산관리, 도시가스 공사비 및 분담금 관리 업무가 전산화돼 1차 전산화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1987년부터는 2단계로 도시가스 부문의 도면 관리, 도면 작성 등의 전산화가 추진되었고, 사무자동화와 경영분석 업무의 전산화에도 속도가 더해졌다. 1988년에는 경영정보시스템(MIS: Management Information System) 구축에도 착수했다. 또 도시가스 부문의 요금 고지와 배관 업무도 전산화를 시작함으로써, 삼천리는 한층 고도화된 경영관리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룹기획실 설치, 그룹 경영 체제로
삼천리는 1987년 10월 1일 그룹기획실을 설치해 운영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삼천리의 경영 방식은 명실상부하게 그룹 체제로 전환되었다.
그동안 삼천리는 신설하거나 인수한 다수의 관계사들이 삼천리와 삼척탄좌를 양 축으로 하는 책임경영의 기조 아래 대체로 자율적인 경영을 해 왔다. 주요 현안에 대해서는 삼천리와 삼척탄좌가 서로 협력하며 해법을 모색하곤 했다.
그러나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도시가스 사업의 정착, LNG 공급 추진, 삼척탄좌의 인도네시아 탄광 개발 등 굵직한 현안이 많아졌다. 단순한 협력·협의만으로는 이러한 현안 과제들을 해결하기도 어려웠다. 현안 과제들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면서 신규사업 추진과 같은 미래 전략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양사의 경영 능력을 합쳐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별도의 통합조직이 필요해졌다.
이에 삼천리는 회장 직할 조직으로 그룹기획실을 신설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신규사업 추진 등의 기획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또 관계사들에 대한 감사 업무도 맡아 각 관계사의 현황과 문제점, 나아갈 방향 등을 파악하고 연구하여 대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전체 조직을 그룹 체제로 운영하여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하고 신규사업 추진과 같은 미래 전략에 대해서도 강한 추진력을 갖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최고경영층 인사에도 변화가 생겼다. 1989년 7월 7일 이장균 선대회장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인현철 사장을 회장으로, 정우진 부사장을 제4대 사장으로 선임했다. 이는 삼천리를 창업해 그룹 규모의 기업으로 성장시킨 창업 1세대가 2선으로 물러나고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올 차세대들이 등장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1992년 1월 1일에는 삼천리에 이만득 부회장이, 삼척탄좌에 유상덕 부회장이 취임했다. 이들은 유성연·이장균 두 창업자를 계승한 창업 2세대로, 이만득 부회장은 1986년 2월, 유상덕 부회장은 이보다 앞선 1985년에 미성상사 이사로 입사하여 그룹기획실에서 각각 근무하기도 했다. 이들의 부회장 취임은 명예회장으로 추대된 유성연·이장균 창업자의 동업 정신이 변함없이 계승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한편, 1984년 3월 20일 제21회 상공인의 날에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한 바 있는 이장균 선대회장은, 1990년 9월 23일에도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했고, 12월 31일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3. 사회공헌활동의 본격 전개
장학사업의 확대 및 공익재단 ‘천만장학회’ 설립
삼천리가 여의도에 자리를 잡은 이후 이전과 달라진 또 하나의 면모는 사회공헌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전에도 삼천리는 “기업활동은 사회발전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유성연·이장균 두 창업자의 철학에 따라 사회공헌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기업은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지역사회와 공존하며 구성원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게 이들의 지론이었다. 특히 교육지원 사업에 깊은 관심을 갖고, 1977년부터는 모든 임직원 자녀들에게 고등학교와 대학교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지급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굴지의 대기업들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러한 때에 ‘재단법인 천만장학회’가 설립된 것은 삼천리의 사회공헌활동과 더불어 시너지효과를 발휘하는 계기가 되었다.
천만장학회는 삼천리그룹 창업자인 이장균 선대회장이 장남인 고 이천득 님(당시 부사장)과 차남인 이만득 부회장(당시 이사)과 함께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장학재단이다. 고 이천득 님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사랑과 이만득 회장의 인재 중시 및 사랑과 나눔의 실천 철학을 투영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고자 설립했다. ‘천만(千萬)’이라는 이름도 두 형제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와 명명했다. 천만장학회는 1987년 4월 21일 발기인총회를 거쳐 5월 1일 정식으로 설립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초대 이사장에는 인정헌 변호사가 취임했다.
천만장학회는 설립 이듬해인 1988년에 고려대학교 등 8개 학교 40명의 학생들에게 3,700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한 것을 시작으로 매년 20~60명 내외의 대학생과 고등학생, 특수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며 대표적인 장학재단의 하나로 성장했다. 특히 미래인재의 꿈과 희망에 동행한다는 마음으로, 고등학교 재학 중에 장학생을 미리 선발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대학 4년 등록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지원하는 특별한 장학제도로 화제가 되었다.
한편, 설립자인 이천득 님은 장학재단을 설립해 장학사업에 앞장선 공로로 그해 12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