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이야기
삼천리 창립과
도시가스 사업 진출
1955 ~ 1992
- Section 1. ‘삼천리연탄기업사’ 창립과 성장기반 구축
- Section 2. 국내 최대 연탄 공급자로의 성장
- Section 3. 연탄 사업 수직계열화와 사업다각화
- Section 4. 삼천리그룹 여의도 시대의 개막
-
Section 5. ‘친환경 에너지’ 도시가스 사업 진출
- 1. 신개념 연료 도시가스의 등장
- 2. 경인 지역 기반으로 도시가스 사업 진출
- 3. 공급권역 확장 및 LNG 시대의 서막
- 4. 도시가스업계 1위 도약
- Section 6. 연탄 사업의 축소 및 관계사의 성장
Section 5
‘친환경 에너지’ 도시가스 사업 진출
1. 신개념 연료 도시가스의 등장
우리나라 도시가스의 시작
우리나라에서 가스산업은 1908년 9월 일본인인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전기, 가스를 공급할 목적으로 일한와사주식회사(日韓瓦斯株式會社)를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회사는 진고개(지금의 충무로)를 비롯해 극히 제한적인 일본인 거주지를 중심으로 가스를 공급했다.
그 이후 별다른 진전이 없던 가스산업이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미군에서 사용하는 LPG(Liquefied Petroleum Gas, 액화석유가스) 일부가 불법으로 유통되면서부터였다. LPG는 원유를 채취하거나 원유 정제 시에 나오는 탄화수소 가스를 비교적 낮은 압력을 가하여 냉각 액화시킨 연료를 말한다. 1964년 울산석유화학단지가 조성되고 정유공장에서 LPG를 자체 생산하기 시작한 이후 LPG의 수요가 빠르게 늘어났다.
1970년대 들어서는 도시가스가 처음으로 선을 보였다. 법률상으로 도시가스는 ‘천연가스, 배관을 통해 공급되는 석유가스, 나프타부생(副生)가스, 바이오가스 또는 합성천연가스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것’을 모두 도시가스라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LNG(Liquefied Natural Gas, 액화천연가스)를 기화시켜 상수도처럼 배관망을 통해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가스를 도시가스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도시가스로 LNG를 사용했다.
LNG는 가스전에서 채취한 천연가스를 정제하여 얻은 메탄을 냉각 상태에서 액화시킨 것으로, 주성분이 메탄이라는 점에서 LPG와 구분된다. 공해물질이 거의 없고 열량이 높아 매우 우수한 연료로 평가된다. 또 인체에 무해하고 수송과 저장 과정도 안전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LNG를 청정에너지라 부르는 이유이다.
도시가스가 일반가정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71년 5월이었다. 집단적 주거 형태를 지닌 도시에서 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도시가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울시가 ‘도시연료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용산구 이촌동의 3,000여 가구를 대상으로 시범사업을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도시가스의 시작이다. 이때는 LNG가 도입되기 전이어서 LPG/Air 방식으로 도시가스를 공급했다. LPG/Air 방식이란 LPG의 재액화를 방지하고 발열량을 조정하기 위해 공기를 일정 비율로 혼합하여 공급하는 방식을 말한다.
서울시는 1972년 11월 강서구 염창동에 나프타분해 방식의 생산설비를 갖춘 남부도시가스 공장을 준공해 가스연료를 공급했고, 1978년에는 중랑구 면목동에 동부도시가스 공장을 건설하며 도시가스의 공급범위를 넓혀나갔다. 또한 같은 해 강남지역에 도시가스를 공급하기 위해 대한도시가스(현 코원에너지서비스)를 민영사업자로 선정함으로써 도시가스 민영화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도시가스 보급 정책과 사업자 선정
1970년대에 발생한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계기로 정부는 에너지 다변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에너지 수급 구조 개편 계획’을 수립해 천연가스의 소비 확대를 장려하고, 1978년 12월에는 ‘가스사업법’(그 후 1983년 12월에 LPG충전·판매사업을 규정한 ‘액화석유가스의 안전관리 및 사업법’과 도시가스 사업을 규정한 ‘도시가스사업법’으로 분리 제정됨)을 제정해 도시가스업 확대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경기도 평택에 LNG기지 건설을 추진하여 1986년 6월 준공하기도 했다.
정부는 경제발전 전망, 에너지 수요 전망, 국내외 석유·가스 시장분석 및 천연가스 수요 전망에 기초하여 천연가스의 장·단기 수급 안정을 도모하고자 2년마다 당해 연도를 포함해 10년 이상의 기간에 걸친 ‘장기 천연가스 수급 계획’도 수립했다. 그리고 1983년 8월에 설립한 한국가스공사를 통해 수도권 도시가스 배관망과 전국을 연결하는 천연가스 배관망 공사에도 착수하는 한편, 도시가스를 산업용 연료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 민간 사업자들의 사업 참여를 유도했다.
정부의 천연가스 보급 확대 의지가 확고해지자 도시가스 사업에 참여하려는 기업이 늘어났다. 특히 석탄 관련 업체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1986년 3월까지 도시가스 공급업체로 허가받은 기업은 18개 사였는데, 이 중 10개 사가 석탄 관련 업체였다.
탄광 및 연탄 업계는 연탄 사업이 사양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주력업종을 도시가스로 탈바꿈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예를 들어, 석탄광산을 운영하며 연탄을 생산하던 봉명그룹은 1978년에 대한도시가스를 합작 설립했다. 부산지역의 왕표연탄 등 5~6개 연탄 사업자들도 1981년에 부산도시가스, 경남에너지, 울산에너지 등 3개 사의 주주로 참여하여 설립했다. 1982년 설립된 목포도시가스도 목포 지역의 연탄 사업자가 설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시가스의 등장으로 연탄 업계에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친 것이다.
2. 경인 지역 기반으로 도시가스 사업 진출
도시가스 사업 진출 모색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으며 1980년대를 맞이한 삼천리는 무연탄 매장량의 한계, 연료 가스화 추세의 확산, 석유가 하락 등 에너지산업의 변화 추이와 연탄산업의 구조적인 한계를 인식하고 삼천리의 미래를 책임질 새로운 사업영역에 대해 다각적으로 연구하고 검토했다.
삼천리의 자세는 매우 신중했다. ‘철저한 검증을 통해 사업 진출을 검토한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신한엔지니어링을 통해 ‘도시가스사업 진출의 타당성 검토’ 연구 용역을 실시하기도 했다.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검토한 끝에 1981년 말경 삼천리는 도시가스 사업에 진출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당초 삼천리는 수요가 많은 수도권 위주로 시장을 공략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서울 지역은 수많은 사업자가 치열한 경쟁을 펼치면서 경쟁사들이 사업권을 선점한 상태여서 공략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한도시가스가 1980년 10월부터 서울 강남 일원에 도시가스를 공급하고 있었고, 1981년 설립된 극동도시가스도 1983년 3월 가스 공급을 목표로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서울시가 운영하던 염창동의 도시가스사업소였다. 서울시는 이 사업소를 민간기업에 불하하는 입찰을 준비하고 있었다. 삼천리는 삼척탄좌를 주축으로 도시가스사업소 인수를 검토했다. 그러나 안전성이 우려될 정도로 공급설비가 노후한 상태여서 조만간 도입될 LNG와의 호환성 문제가 걸림돌이었다. 인수 가격에 대한 견해 차이도 너무 컸다. 이에 삼천리는 도시가스사업소 인수 계획을 포기하기로 했다.
경인도시가스 인수 및 흡수합병
서울 지역으로의 진출을 포기한 삼천리는 경기도 및 인천 지역에 진출하기로 계획을 선회했다. 이미 인구밀집도가 높은 서울보다는 지역개발이 활발해 꾸준한 수요 확대가 예상되는 경인 지역이 중장기적으로는 더욱 긍정적인 시장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 같은 전망을 토대로 삼천리는 시장에 매물로 나온 ‘경인도시가스’를 인수하기로 했다.
경인도시가스는 1979년 5월 당시 정·재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인천·경기도 지역에 도시가스를 공급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였다. 1981년 6월 30일 경기도로부터 인천시 전 지역과 경기도 일부(안양·군포·의왕) 지역에 대한 공급 허가도 받아놓았다. 하지만 1981년 7월 1일 인천시가 직할시로 승격돼 경기도에서 독립하게 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1982년까지 1년이 지나도록 사업 추진에 별다른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 바람에 경영이 어려워진 경인도시가스는 결국 회사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경인도시가스 매각 소식이 알려지자,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인수전에 뛰어들어 경쟁이 치열해졌다. 삼천리는 인현철 사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실무팀을 구성하고 인수 준비에 돌입했다. 당시 인수전에 뛰어든 기업들은 규모나 지명도에서 삼천리보다 월등히 앞서 있었다. 하지만 삼천리는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로 인수 협상에 임했다. “도시가스 사업이 공익적 성격이 강한 만큼 단순히 영리적 측면만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알리고, 창립 이래 줄곧 국민연료로서의 에너지사업을 해온 삼천리의 강점과 기업정신을 강조했다.
경인도시가스 측은 삼천리의 이 같은 방침과 기업정신을 높이 평가하며 삼천리를 인수기업으로 선정했다. 공공성을 중시한 삼천리 창업자들의 철학과 그간의 공적에도 높은 점수를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삼천리는 1982년 5월 19일 경인도시가스 주식 100%를 매입하여 경인도시가스를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경인도시가스를 인수한 삼천리는 경인도시가스의 조직 분위기를 추스르고 경영 전반을 재정비했다. 먼저 이장균 회장을 대표이사 회장으로, 경인도시가스 남영우 사장을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했다. 이와 함께 증자를 단행하여 총 납입자본금을 4억 5,000만 원으로 늘렸다.
1982년 말에는 실무를 담당할 신입사원을 모집해 현업에 배치했다. 삼천리 본사에는 도시가스 사업을 담당할 조직을 신설하고 필요인력을 배치했다. 경인도시가스 법인은 도시가스 사업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일단 존치해 두었다가 도시가스 사업이 본궤도에 오른 1984년 12월 10일 삼천리에 흡수 합병했다.
이로써 오랫동안 ‘삼천만의 연료’로 명성을 쌓아온 삼천리는 도시가스라는 새로운 영역에 진출하여 도시가스 기업으로의 도전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신중함이 가져온 전화위복의 기회
삼천리는 경쟁사보다 도시가스 사업에 조금 늦게 진출하는 바람에 가장 큰 시장인 서울 지역에 진입하지 못했다. 사업 진출이 늦어진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어떤 일이든 철저하게 검증하고 확신이 생긴 후에 시작하는 두 선대회장의 신중한 경영 철학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삼천리는 의사결정은 신중하게 하되 한 번 결정을 내리면 주저하지 않고 추진하는 강력한 실행력을 갖고 있다. 도시가스 사업에서도 비록 출발은 늦었지만 강력한 실행력을 발휘한 덕분에 성장 속도는 매우 빨랐다. 서울에는 진입하지 못했지만, 그 대신 인천과 경기도 서남부 지역을 공급권역으로 확보함으로써 오히려 미래 성장 가능성을 높이는 전화위복의 기회를 만들었다.
선발기업들보다 약 3년 정도 늦게 도시가스 사업을 시작한 그 사이에, 정부의 천연가스(LNG) 도입 정책이 확정된 것도 삼천리에게는 유리한 여건이 되었다. LPG에 공기를 주입하거나 원유를 정제한 뒤의 부산물인 나프타를 분해하여 생산한 가스를 공급하던 기존의 방식이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예상하고 삼천리는 가스 발열량, 연소속도 등을 설계 단계에서부터 LNG와 호환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준비했다. 덕분에 1987년 LNG 공급이 시작될 때, 삼천리는 별도의 발열량 조정 작업 없이 자연스럽게 천연가스 공급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신중하게 의사결정하느라 늦어진 시간이 삼천리에게는 투자비용을 절감하고 장차 더 큰 기회를 창출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셈이었다.
안양공장 준공
경인도시가스를 인수한 직후 삼천리는 도시가스 제조공장 건설에 착수하여, 1982년 11월 5일 안양시 안양동 197번지 터에서 경인도시가스 안양공장 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이 부지는 면적이 좁고 건축법상 보안거리 규정에도 저촉된다는 사실이 드러나 공사가 중단되었다.
삼천리는 1983년 초 경기도 시흥군 군포읍 당정리(지금의 군포시 당정동) 455, 456번지 일대 14,092㎡(4,263평)의 부지를 새로 마련하여 공사를 재개했다. 안양공장은 약 1년 동안의 공사 끝에 1983년 10월 26일 준공되었다. 준공 당시 안양공장은 30톤 규모의 LPG 탱크 3기와 하루 12만㎥의 도시가스를 생산할 수 있는 기화기 및 혼합기 3기, 비상시에 대비한 비상발전기 1세트를 보유했다.
중요한 것은, 배관망을 포함한 모든 설비를 1980년대 말경 도입하기로 예정된 LNG 공급계획을 전제로 설계했다는 점이다. LNG 도입 때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임시 설비로 시공하였다가 LNG 도입 이후에는 비상 설비로 전환해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고, 설비비가 저렴하고 전용(轉用)이 용이한 LPG/Air 방식을 채택했다. 공급열량도 LNG와 호환성이 있는 1만 500kcal/㎥로 책정하여 LNG 도입 이후 거쳐야 할 조정 작업을 최소화하도록 했다.
삼천리가 이 같은 전략을 취한 것은 사업 초기의 수익성 확보와 안정적인 조업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시가스는 장치산업이어서 초기에는 투자비가 많이 들어가는 데 비해 수요자는 적을 수밖에 없어 사업 초기의 자금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더욱이 수년 후로 예정된 LNG 도입이 이루어지면 추가 투자비가 소요되어야 한다. 삼천리는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최적의 투자 설계를 한 셈이었다.
3. 공급권역 확장 및 LNG 시대의 서막
경기도시가스 인수와 공급권역 확장
삼천리는 도시가스 사업 개시 이후 공급권역을 확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83년 기준으로 수도권의 공급권역은, 서울 지역은 대한, 서울, 극동, 강남, 한일 등 5개 사가 나눠 맡고, 경기도 안양·시흥은 삼천리(당시 경인도시가스), 부천은 경기도시가스가 맡도록 허가되어 있었다. 삼천리는 안양·시흥 지역의 공급권을 바탕으로 ‘도시가스 공급의 효율성 제고와 규모의 경제’라는 논리를 내세워 수원과 광명 지역에 대한 공급권을 확보했다.
이어 1983년 10월에는 경기도시가스를 인수해 공급권역을 부천 지역으로 확대했다. 경기도시가스는 부천 지역에 도시가스를 공급하고자 신한에너지가 주축이 되어 1981년 말 설립한 회사였다. 삼천리는 수도권 서부 지역의 도시가스 공급권을 확대하기 위해, 당시 부천공장을 건설하느라 자금 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경기도시가스를 인수했다. 인수 후에는 부천시 도당동 246번지 5,313㎡(1,607평) 부지에 시공 중이던 부천공장 건설에 박차를 가해 1984년 4월 준공했다. 준공 당시 부천공장은 40톤 규모의 LPG탱크, 하루 10만㎥의 도시가스를 생산할 수 있는 설비와 비상발전기 1세트 등을 갖추고 있었다. 삼천리는 1984년 10월 경기도시가스를 흡수 합병하여 인천공장 부천영업소로 재편했다.
이후에도 삼천리는 공급권역 확대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여 1986년에는 안산시와 화성군 태안읍에 대한 공급권을 확보했다. 이 중 안산시는 잠재수요가 풍부하다는 이유로 당시 안산공단에 있던 동방철관이라는 기업이 도시가스 공급회사 설립을 시도하는 바람에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삼천리는 안산시 고잔동 소재 아파트에 이미 LPG 집단공급시설을 설치하여 도시가스를 공급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공급설비 운영의 효율성을 주장하여 공급권 확보에 성공했다.
1988년 2월에는 시흥시 전 지역에 대한 공급권을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대한도시가스의 대주주인 SK그룹과 공급권을 놓고 경합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번에도 이미 안산·부천 등지에 공급권을 가진 삼천리가 도시가스를 공급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내세워 공급권을 확보했다. 대신 경기 동남부 지역인 여주·이천 등지에 대해서는 SK에 양보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이를 계기로 삼천리는 화성 반월에 대한 공급권도 추가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 1988년 9월 삼천리는 평택시·송탄시 전 지역과 용인군 기흥읍에 대한 도시가스 공급권도 확보했다. 용인 지역을 놓고 서울 강남 및 과천시에 도시가스를 공급하던 대한도시가스와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도시가스 공급망 건설의 합리성과 도시가스 회사 사이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해 서로 양보하기로 하고, 용인 지역은 삼천리가, 광주 지역은 대한도시가스가 공급권을 갖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삼천리는 1991년 6월 오산시 화성군(우정면 제외)과 용인군에 대한 공급권을 확보했고, 1992년에는 평택군 전 지역에 대한 공급권도 추가로 확보했다.
이처럼 삼천리는 공급권역 확보를 위해 줄기찬 노력을 계속하여 1992년 무렵에는 수원시, 안양시, 부천시, 광명시, 군포시, 의왕시(시흥군 의왕읍에서 시로 승격)와 인천시 일부 지역, 안산시, 평택시, 송탄시, 시흥시, 화성군, 용인군, 평택군 등에 대한 도시가스 공급권을 확보해 경기도 서남부 지역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삼천리는 국내 최대의 도시가스 회사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인천직할시의 공급권역 조정
삼천리가 공급권역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지역은 인천이었다. 1982년 5월 인수 당시만 해도 경인도시가스는 경기도 지역의 유일한 도시가스 회사로서 인천을 포함한 경기도 일대를 공급권역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기도로부터 공급권을 허가받은 날이 1981년 6월 30일인데, 하루만인 7월 1일 자로 인천시가 경기도에서 분리되어 직할시로 승격하는 바람에 인천시의 공급권이 오리무중 상태가 되어 있었다. 삼천리가 경인도시가스를 인수할 당시에도 공급권역은 명확하게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삼천리는 이미 허가받은 공급권을 인정해 달라고 인천시에 요청했다. 그러나 인천시가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었고, 그 사이에 인천도시가스가 뒤늦게 설립돼 결국은 양사가 경합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더 이상 기다리기 어려워진 삼천리는 1983년 초 인천공장 건설에 착공하는 동시에 배관설비 매설 공사에 대한 인가를 요청했다. 인천시는 또다시 결정을 미루다가 인천공장 준공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 돼서야 조정안을 내놓았다. 삼천리에게는 중구, 동구, 남구 전역과 남동구 일부 지역 등 27개 동에 대한 공급권을 부여하고, 나머지 서구, 북구 전 지역과 남동구 일부 지역은 인천도시가스에 공급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조정안은 지역 특성이나 세대 수 측면에서 삼천리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삼천리는 고심 끝에 상생을 추구한다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인천시의 조정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논란을 마무리했다.
삼천리는 1984년 9월 3일 인천시 서구 가좌동 477번지 소재 5,382㎡(1,628평)의 부지 위에 인천공장을 준공했다. 준공 당시 인천공장은 80톤 규모의 LPG탱크, 하루 12만㎥의 도시가스를 생산할 수 있는 설비와 비상발전기 1세트를 구비하고 있었다. 삼천리는 인천공장 준공과 동시에 미도아파트 28세대를 대상으로 인천 지역에서의 첫 도시가스 공급을 개시했다.
민간기업 최초 천연가스 시대 개막
정부는 1973년 1차 석유파동 직후부터 LNG 도입을 검토했다. 발전용 연료로 쓰고 있던 석유를 대체하려는 목적이었다. 정부는 1978년 10월을 목표시점으로 잡고 LNG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함께 LNG를 발전용 위주로 공급하고 잔여분을 도시가스용으로 공급하여 1986년까지 도시가스 보급률을 28.9%로 높인다는 방침을 정했다. LNG를 도시가스용으로 공급하여 생활 에너지원을 석탄·석유와 같은 기존의 화석연료에서 가스연료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정부는 한국가스공사와 함께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에 LNG 인수 및 생산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1983년 6월 공사를 시작해 1986년 말 1단계, 1987년 7월 2단계 공사를 완료했다. 동시에 평택기지에서 기화·송출한 LNG를 수요처에 공급하는 주 배관로와 도시가스 공급망 건설공사도 병행했다. 평택기지에서 인천화력발전소에 이르는 총연장 98.3km의 주 배관로 공사는 1983년 3월 착공하여 1986년 11월 완공했다. 주 배관로에서 각 도시가스 회사로 연결하는 간선 공급망은 1984년 11월 착공하여 1987년 12월 완공했다. 총연장은 128km에 달한다.
이에 따라 각 도시가스 회사에 LNG가 공급되게 되었다. 그동안 주로 LPG/Air 방식으로 도시가스를 공급하던 도시가스 회사들은 평택기지에서 LNG를 공급받아 일반 수요처에 공급하는 방식으로 서비스 방식이 바뀌게 되었다. 별도의 생산공장을 두지 않고 자체적으로 건설한 공급망을 통해 LNG를 각 수요처에 공급하는 형태였다.
LNG로의 전환을 앞두고 삼천리는 1986년 12월부터 1987년 1월에 걸쳐 인천·구산·석수·안산에 지구정압기를 설치했다. 지구정압기는 한국가스공사에서 공급받은 고압의 천연가스(NG)를 수요처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압력을 낮추는 시설이다.
지구정압기 설치 직후인 1987년 2월 2일 오후 2시 22분, 삼천리는 부천시 심곡동 청실아파트 2동 202호에 대한민국 민간기업 최초로 천연가스를 공급했다. 이날 삼천리는 동력자원부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LNG 공급 개통식을 갖고, 인천 구산 공급 관리소에서 공급받은 LNG를 해당 아파트에 공급했다. 삼천리의 LNG 시대를 개막한 순간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민간 LNG 시대를 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최초 공급한 시간과 장소를 오후 2시 22분, 2동 202호로 잡은 것은 2월 2일이라는 개통식 날짜의 의미를 부각하기 위한 것이었다.
삼천리는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2월 9일 부천 지역, 2월 10일 안양 지역, 2월 18일 인천 지역, 그리고 2월 22일 안산 지역에 LNG 공급을 개시하며 LNG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LNG 전환에 2년이 걸린 일본보다도 훨씬 빠른 3개월 만에 이뤄낸 놀라운 성과였다.
삼천리가 이처럼 단기간에 LNG 전환을 완료할 수 있었던 것은 다각적인 연구와 분석을 통해 LPG/Air 방식과의 호환성 등 예상되는 문제들을 사전에 해결해 놓은 덕분이었다. 또 일본의 사례를 연구하고 일본인 기술자를 초청해 기술 지도를 받는 등 준비에 만전을 기한 덕분이었다. 철저한 준비와 신속한 실행으로 이룬 삼천리의 LNG 전환 사례는 업계 안팎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4. 도시가스업계 1위 도약
산업용 수요처 개발을 위한 노력
삼천리가 도시가스 공급을 시작한 이후 초기의 영업은 순탄치 않았다. 서울처럼 대규모 공동주택 밀집지역이 별로 없는 데다 이미 시장을 선점하고 있던 LPG 공급자들과도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다. 더욱이 상대적으로 비싼 시설 공사비 부담과 도시가스에 대한 주민들의 인식 부족으로 수요가 수를 늘리기가 쉽지 않았다.
삼천리는 수요처 증대를 위해 공급권역 내 대규모 공동주택은 물론 소규모 공동주택들도 일일이 방문하면서 활발하게 영업활동을 전개했다. 동시에 상업용 건물에 대해서도 홍보를 강화했다. 이러한 활동이 효과를 나타내면서 1984년 2월 29일 상업용 건물로는 처음으로 안양시 성모병원에 도시가스 공급을 시작했다. 또 1984년 6월 26일에는 공급계약 1만 세대를 돌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매우 미미한 수준이었다. 고심 끝에 삼천리는 도시가스 사업허가 조건과 관련 법규를 검토한 후 도시가스를 산업체에 산업용으로 공급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당시 정부 당국과 경쟁사들도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로, 도시가스의 사용 범위를 확장하고 대량의 수요처를 개발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삼천리는 즉시 산업용 공급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마련했다. 산업용 에너지로서 갖추어야 할 열량의 균일성과 정밀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연구하면서 한편으로는 지자체 설득에도 나섰다. 당시 지자체들은 도시가스는 가정용 연료라며 산업용 공급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삼천리는 일본의 사례를 조사하여 분석하고, 산업용 도시가스의 장점과 기대효과 등을 제시하며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 결과 경기도와 안양시 등 관련 지자체로부터 산업용 도시가스 공급업체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에는 새로운 수요처 발굴을 위해 일일이 산업체를 방문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부분의 산업체들이 생소한 연료를 사용하는 데 따르는 우려가 있어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수개월에 걸친 설득과 현장 실험을 통해 이해를 높여나갔다. 그 결과 점차 수요가 늘기 시작했다. 1985년 말 가장 먼저 경기도 군포의 두산유리가 수요처로 이름을 올렸고, 한국유리, 삼성전관, 기아자동차 등 대형 기업체들이 뒤를 이었다.
이로써 삼천리는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아이디어로 산업용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성과를 올렸다. 산업용 도시가스는 삼천리의 실적에도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첫 업계 1위 기록
삼천리는 가정용 수요처 증대와 함께 산업용 수요처 개발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수요처 수를 늘려나갔다. 그 결과 도시가스 공급 3년째인 1985년에는 3만 5,000세대와 5개 업무용 건물, 23개 기업에 총 526만㎥의 도시가스를 공급할 만큼 성장했다. 이는 전국 도시가스 공급량의 6.6%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이듬해인 1986년에는 전년보다 250% 신장한 1,842만㎥를 공급해 전국 도시가스 공급량의 14.6%를 담당했다.
1987년은 삼천리에게 기념비적인 한 해가 되었다. 1987년은 LPG/Air에서 LNG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해로, 삼천리는 전년 대비 73% 신장한 3,201만㎥를 공급해 선발기업들을 제치고 업계 1위를 기록했다. 공급세대수는 58,406세대, 상업 및 업무용 수요처는 86곳, 그리고 산업용 수요처도 44곳에 달했다.
그 이후에는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업계 순위에서 2~3위를 오르내릴 때도 있었지만, 매년 13~15% 안팎의 시장점유율을 유지하며 1992년에는 3억㎥ 이상의 도시가스를 공급하는 실적을 내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는 삼천리가 도시가스 사업의 조기 안착과 안전하고 편리한 청정연료의 보급을 위해 한마음으로 노력한 데 따른 결과로 분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