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이야기

70년 이야기

삼천리 창립과
도시가스 사업 진출

1955 ~ 1992

Section 2

국내 최대 연탄 공급자로의 성장

1. 주식회사 전환 및 조직 재정비

법인체 <삼천리연탄주식회사>로 재탄생

1960년대 중반 우리나라는 1962년 시작된 정부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며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자연히 연료 수요가 급증했다. 정부는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을 위해 가정용 연료로 연탄을 사용하라고 권장했다. 연탄은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열효율이 높아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주요한 연료로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이에 힘입어 삼천리도 고속 성장을 이어갔다. 1965년에는 연간 13만 톤의 실적을 거둬 업계 3위까지 뛰어올랐다. 삼천리 연탄은 품질이 우수하고 소비자의 신뢰도 높아 수요가 급증했다.
그러자 소비자의 신뢰와 기대에 부응하는 좋은 제품을 더 많은 소비자에게 신속하게 공급하기 위해서는 현대화된 설비와 연구개발 조직, 효율적인 경영관리 체계를 갖출 필요가 커졌다. 동시에 시설 확장에 필요한 자금도 추가로 확보해야 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천리는 회사를 법인체로 전환하기로 했다.
법인체 전환 준비는 1965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다. 본사 차원의 경영체제 통합관리, 직급제 등 인사관리제도 도입, 우수인재 확보 등 많은 변화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를 토대로 1966년 7월 7일 삼천리는 주식회사로 재탄생했다. 이 날을 법인 전환일로 택한 것은 “행운의 상징인 7자가 겹치는 날로 하자”는 이장균 당시 부사장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법인의 이름은 <삼천리연탄주식회사>로 정했다.
발기인은 유성연 사장과 이장균 부사장을 비롯해 이득호, 최단경, 홍동식 이사, 그리고 김승석 감사 등이었다. 본사는 성동구 신당동 248-18번지에 두었다가 법인전환 직후인 1966년 10월 중구 광희동1가 211번지로 이전했다. 본사 조직으로는 총무부(총무과, 경리과)와 관리부(업무과, 수송과)를 두고, 시흥공장을 제외한 신당공장, 제기공장, 수색공장 등 3개 공장을 법인 산하 생산공장으로 편입했다.
법인 전환을 계기로 삼천리는 연탄생산업체 중에서는 선도적으로 공개채용을 실시하여 1966년 10월 5명, 12월 10명, 1967년 10월 20명의 신입사원을 선발했다. 사원 수가 빠르게 늘어나자 1969년 1월에는 중구 필동1가 3의 6번지 서울빌딩 3개 층을 임대하여 새로운 본사 사옥으로 사용했다.
법인 전환에 따라 삼천리는 대외적으로 공신력이 향상되고 자금 조달 여건도 개선돼 신규사업이나 관련 산업에 대한 투자에 적극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삼천리는 1971년 5월과 1972년 3월 연거푸 증자를 실시하여 납입자본금을 2억 2,648만 원으로 늘림으로써 사업 확장을 위한 투자재원 마련에 성공했다. 경영관리체계가 정비돼 업무관리의 효율성을 높인 것도 법인 전환이 가져온 효과 가운데 하나였다.

1966.07.07. 삼천리연탄주식회사 법인 설립
1966.10. 본사 사무실 이전(광희동1가 211번지)

법인 전환 당시 삼천리 조직 개요

임원
: 사장 유성연, 부사장 이장균, 이사 이득호·최만경·홍동식, 감사 김승석
본사
: 서울 성동구 신당동 248-18번지
조직
: 총무부(충무과·경리과), 관리부(업무과·운송과)
공장
: 신당공장, 제기공장, 수색공장
저탄장
: 청량리저탄장, 성동역저탄장

기계사업의 첫걸음 <삼진기공사> 설립

법인 전환 이후 삼천리는 연관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기로 했다.
먼저, 1967년 4월 제기공장 내에서 기계 및 운송기구 수리를 담당하던 기계제작소를 기반으로 <삼진기공사(三進技工社)>를 설립해 기계공업 분야에 진출했다. 손수레와 기계 수리 업무를 전문화하고 장차 연탄제탄기와 부품 등을 자체 생산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였다. 삼진기공은 설립 2년 만인 1969년 4월 처음으로 제탄용 소형윤전기를 자체 개발하는 데 성공하고 6월부터 윤전기를 직접 제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70년 1월 삼천리는 조직 운용의 효율을 높이고 생산성 향상을 도모한다는 취지에서 삼진기공을 흡수 통합해 ‘삼천리기계제작소’로 개편했다. 1973년 7월 1일에는 기계제작소를 이문공장으로 이전하고, 산하에 개발실, 생산부, 관리부를 두어 조직을 확대했다. 이를 계기로 기계제작소는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해 연탄윤전기 등 제탄기 개발에 성공하며 삼천리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0.01.01. 삼천리기계제작소 설립

이장균 사장 취임과 인사제도 혁신

창립 14주년을 맞은 1969년 10월 1일, 유성연 사장이 회장으로 승진하고 이장균 부사장이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장균 사장은 회사의 경영체제를 현대화하고 보다 강건한 조직 체질을 갖추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먼저, 회사의 미래상을 ‘에너지산업의 선도회사’로 설정하고, 이를 실현할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인재 발굴과 사업영역 확장에 힘을 쏟았다. 특히 취임 첫해인 1970년을 ‘도약의 해’로 정하고, 그해 1월부터 공장장회의를 월례회의로 정례화하여 운영하는 등 조직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유능한 인재를 영입해 조직역량을 강화하는 노력도 빠뜨리지 않았다. 1972년 3월 이원복 전무와 인현철 전무를 영입해 신제품 개발, 품질향상, 조직 재정비 등의 업무를 담당토록 했다. 외부에서 경륜 있는 전문 인재를 과감하게 영입함으로써 삼천리는 한층 더 강한 조직역량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한편, 1973년 7월 1일 삼천리는 기업 규모에 걸맞은 최적의 관리체계를 갖추기 위해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이를 통해 총무부와 관리부로 되어 있던 기존 조직을 총무부, 경리부, 생산부, 영업부로 세분화하여 각각 특성화된 업무를 담당토록 했다. 각 공장에는 생산계, 영업계, 서무계, 검탄계를 두었다. 특히 이문공장에는 시험연구실을 두고 나머지 공장에는 분석계를 두어 신제품 개발과 품질관리 업무를 전담하도록 했다.
이날 조직개편은 법인화 이후 가장 큰 폭의 변화를 가져온 대규모 조직개편으로, 그 이후 삼천리 조직체계의 근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어 1974년 7월 1일 삼천리는 사장 직속으로 기획부를 신설하여 회사의 합리적인 경영계획 수립과 신규사업 개발 등의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한편, 창립 당시 10명 안팎으로 시작한 삼천리의 사원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법인으로 새출발한 1966년 말에는 190명을 넘겼고, 1969년에는 사무기술직 사원 47명, 생산직 고원(雇員) 203명, 용원(傭員) 399명 등 모두 649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삼천리는 빠르게 증가하는 구성원 모두의 의욕을 증진하고 애사심을 고취한다는 취지에서 인사제도를 개선했다. 이를 통해 사무기술직 사원의 직급체계를 1급(부장 또는 공장장), 2급(과장 또는 공장장), 3급(계장), 4급(주임) 등 기존 4직급 체계에서 1973년 7월 1일 5급(서기) 직급을 신설해 5직급 체계로 개편했다. 동시에 승진에 필요한 최소연한도 제정했다.
사원 교육도 강화했다. 1971년 7월 처음으로 생산직·영업직·관리직 등 각 직군별로 최적화된 교육교재를 만들어 각 직군의 특성에 맞는 교육훈련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1973년 7월에는 경기도 남양주군 수동면 운수리에 처음으로 야외교육장을 설치하여 교육훈련의 질을 높이기도 했다.
이장균 사장은 “기업은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라며 “교육을 시키고 인재를 축적하는 것이 우리 기업의 당면 과제이면서 내일의 번영을 약속하는 방법”이라며 끊임없이 우수한 인재 확보와 육성에 힘을 쏟았다.

임원회의 주재하는 두 선대회장

경영슬로건 및 사시·사훈·사가 제정

이장균 사장 취임 이후 삼천리의 중요한 관심 사항 중 하나는 기업의 이념과 정신을 정립하는 일이었다. 전 구성원이 나아갈 방향과 가치를 공유하여 애사심을 고취하는 동시에 공동체로서의 일체감을 가지도록 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이 같은 배경에서 1970년 새해 아침, 삼천리는 시무식을 열고 이장균 사장의 신년사를 통해 그 해의 경영목표를 경영슬로건으로 제정해 발표했다. 이때부터 시무식을 매년 초에 정례적으로 개최하고 경영슬로건도 공표하여 모든 구성원이 공유하도록 했다. 1970년은 ‘도약의 해’, 1971년에는 ‘혁신의 해’, 1972년에는 ‘절약의 해’, 1973년에는 ‘가정애(愛)·직장애(愛)’, 1974년에는 ‘상승하는 물가, 증산으로 잡자’, 1975년에는 ‘사전관리의 해’ 등이었다.
이 가운데 1973년에 공표한 경영슬로건 ‘가정애, 직장애’는 삼천리의 기업정신을 대변하는 사시(社是)로도 제정되었다. “가족끼리 사랑하고 존경함으로써 화목한 가정이 되어야 훌륭한 인격을 지닌 사회인이 될 수 있고 성실한 직장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다”는 사상, “직장이 바로 가정의 연장으로서 존경과 사랑을 바탕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정신을 담았다. 이러한 정신은 그 이후 삼천리의 조직문화를 이루는 근간이 되었다.
이와 함께 삼천리는 ‘성실(誠實), 일진(一進)’을 사훈(社訓)으로 제정했다. “성실한 자세를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간다”는 이념적 가치관을 보여주는 이 사훈은 “성실하게 일하고 남보다 한발 앞서서 좋은 상품을 만들어 고객에게 봉사하자”는 창업정신을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삼천리가 사시와 사훈을 제정한 것은, 기업의 정체성과 공유가치를 명확히 하고 모든 구성원이 추구해야 할 조직문화를 구체화하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편, 1972년 4월 삼천리는 회사의 정체성과 비전을 제시하고 구성원들의 소속감과 단결력을 높이기 위해, 나아가 대내적으로는 긍정적 에너지를 고취하고 대외적으로는 기업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사가(社歌)를 제정했다. 저명한 동요작가 윤석중이 노랫말을 쓰고 작곡가 김대현이 곡을 붙인 사가는 그 이후 각종 사내 행사에서 불려져 삼천리가족을 하나로 만드는 매개체가 되었다.

1972.04. 삼천리산업 최초의 사가 제정

2. 이문공장 건설과 4대 공장 체제 구축

연탄파동 및 석탄산업의 위기

삼천리가 법인체로 전환하며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던 1966년 가을 무렵 연탄시장에 이른바 ‘연탄파동’이라 불리는 태풍이 몰아쳤다. 연탄 부족 문제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면서 사회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혹한이 예고된 겨울을 앞두고 발생한 연탄 부족 사태는 많은 국민을 추위에 떨게 하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시민들 사이에서 연탄 사재기가 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연탄 부족 사태는 기본적으로 산업화·도시화의 급격한 진전에 따른 수요의 증가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석탄 생산지에서 소비지로 연결하는 수송 수단, 그중에서도 철도망이 미비하다는 데 있었다. 탄광지역에서 소비지역, 특히 서울 지역으로 석탄을 수송할 철도망이 부족해 소비지에 아무리 많은 공장을 지어도 급증하는 연탄 수요를 충족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대책이 더 큰 혼란을 불러왔다. 정부는 매년 반복되는 연탄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1966년 11월 16일 대통령 지시를 통해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을 제시했다. 주유종탄이란 석유류를 주 연료로 사용하고 무연탄은 보조연료로 사용하는 에너지 시책을 말한다.
정부는 발전소와 공공기관의 난방 연료를 유류(벙커C유)로 바꾸는 등 관수용 무연탄을 석유로 대체했다. 무연탄과 연탄을 많이 사용하는 목욕탕, 숙박업소 등 민간 상업시설에 대해서도 유류 사용을 의무화했다. 유류 사용을 확대하기 위해 석유류에 대한 수입 관세를 면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주유종탄 정책은 유류 사용의 급격한 증가와 석탄 소비의 감소라는 상반된 결과를 가져왔다. 그 바람에 1967년 7월 기준으로 석탄 산지에는 200만 톤이 넘는 무연탄이 그대로 쌓여 있을 정도로 석탄산업 전체가 침체에 빠져들었다.
결국 영세한 탄광들이 줄줄이 폐광하거나 휴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200여 개에 이르던 탄광이 1969년에는 50여 개만 남고 나머지는 폐광으로 변했다. 5,000여명에 이르는 광부들이 일자리를 잃어 실직 문제가 사회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연탄산업도 크게 위축돼 규모가 작은 연탄 제조업체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다. 서울의 경우만 해도 200여 개에 이르던 연탄공장 수가 1969년에는 20여 개로 줄어들었다. 석탄산업 사상 처음 맞는 위기였다.

1967.09.09. 이문공장 기공식

대형 연탄공장 이문공장 준공

정부의 주유종탄 정책 시행 이후 연탄 소비자들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그러잖아도 겨울만 되면 연탄을 구하느라 불편을 겪던 소비자들은 주유종탄 정책 시행 이후 연탄을 확보하는 데 더 많은 애를 먹어야 했다. 상표나 품질을 따져보지도 못하고 아무 연탄이든 먼저 확보하는 것이 우선일 정도로 다급한 일이 되었다. 그렇다보니 조잡한 원료로 저품질의 연탄을 만들어 공급하는 업체들도 적지 않았다.
삼천리는 연탄 부족이라는 특수한 시장환경에서도 좋은 품질의 연탄을 공급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주유종탄 정책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민에게는 여전히 연탄이 가장 중요한 연료이고 핵심적인 난방 수단”이라는 점을 생각해서, 더 많은 국민에게 질 좋고 유익한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창립 당시의 초심을 유지한 것이다.
삼천리의 이러한 자세는 소비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저품질의 연탄을 경험해본 소비자들이 품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평소 우수한 품질로 신뢰를 쌓아온 삼천리연탄을 더욱 선호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연탄파동을 거치면서 삼천리연탄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기업이미지도 향상되었다. 삼천리에 수요가 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삼천리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생산량을 더 늘릴 수 있도록 기존의 제기·신당·시흥·수색 등 4개 공장 외에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마침 신당공장과 제기공장은 도시화의 진전으로 주변 지역이 주택지로 변모한 탓에 공장 이전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두 공장을 대체하면서 생산량도 늘릴 수 있는 대형 공장 건설이 절실했다.
이러한 때에 1967년 초 정부는 서울 동북부 지역인 동대문구 이문동 중랑천변에 33만 580㎡(약 10만 평) 규모의 연탄산업단지를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서울 시내 주택가에 있는 연탄공장을 회사별로 통폐합한 후 이곳으로 이전토록 한다는 내용의 대통령 지시도 공개했다. 연탄산업단지에는 대규모 저탄장 설치를 허가해 모든 연탄 공장의 숙원이었던 저탄장 문제도 해결할 수 있도록 했다. 원활한 원탄 공급을 위해 철도를 가설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입주 대상 기업은 삼천리를 비롯해 한성·한일·동원·칠표·정원·태양 등 모두 7개 사였다.
신공장 건설을 검토하고 있던 삼천리는 이문연탄산업단지 입주가 도약의 기회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입주를 결정했다. 그리고 대상 업체들 가운데 가장 넓은 동대문구 이문3동 22-2번지 일대 3만 3,058㎡(1만여 평)의 부지를 매입했다.
삼천리는 1967년 5월 저탄시설을 우선 건설하고 원탄 상차용 이동식 컨베이어 2대를 설치해 ‘원탄 운반의 기계화’를 이루었다. 청량리역 저탄장은 1967년 8월 4일 폐쇄 조치했다. 곧이어 1967년 9월 9일 공장 건설을 시작해 1968년 1월 1일 준공했다. 삼천리의 성장에 주춧돌 역할을 하게 될 이문공장이 탄생한 것이다. 준공 당시 이문공장은 8대의 윤전기와 국내 최대 규모인 연간 약 10만톤 규모의 생산능력을 갖추었다. 또 30만 톤 규모의 저탄능력도 함께 구비했다.
이문공장은 입주업체 가운데 가장 넓은 부지를 확보함으로써 대량생산체제를 갖추는 것은 물론 향후 설비 증설도 가능하게 되었다. 또 중랑천 둔치에 입지해 있어 공해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 원탄 저탄에서부터 생산과 출하에 이르기까지 생산 공정의 일원화를 기할 수 있게 된 점도 장점이었다.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간 이문공장은 가동 첫해인 1968년에 11만 톤의 생산량을 기록하며 삼천리 전체 생산량의 25%를 차지했다.

오류공장 인수로 4대 공장 체제 구축

이문공장이 본격 가동됨에 따라 삼천리는 1970년 4월 3일 신당공장을, 1971년 4월 제기공장과 제기저탄장을 폐쇄했다. 이로써 삼천리의 창업기와 성장기를 이끌며 서울 시민에게 따뜻한 겨울을 선사했던 두 공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법인 전환 당시 빠져 있었던 시흥공장은 1969년 1월 1일 삼천리 법인에 편입해 다른 공장들과 시너지를 높이도록 했다.
삼천리는 이문공장 가동을 계기로 공급망을 서울전역으로 확대했다. 그런데 유독 영등포 인근 지역에서는 판매가 부진했다. 서남부 권역인 영등포 지역이 이문공장에서 워낙 먼 거리에 있어 수송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삼천리는 영등포 지역의 공급량을 늘리기 위해 이지역에 기반을 둔 태성연탄 오류공장을 인수하기로 했다. 영등포구 오류동 74-9번지에 소재한 태양연탄은 1970년에 설립된 비교적 신생 업체로 단탄식 제탄기 12대와 중탄기 1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작지 않은 규모이지만 판매실적이 저조해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삼천리는 여러 의견을 다각도로 검토한 끝에 오류 공장을 인수하기로 했다. 당장은 판매실적이 저조하다고 해도 영등포 지역은 인구밀집도가 높아 연탄 수요가 많고 향후 영등포와 구로 지역이 공업단지로 발전할 수 있어 잠재수요가 크다고 본 것이다. 인천·주안 등 서남부의미개척 시장으로 공급망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도 한몫했다. 판매 부진 문제는 인수 이후 삼천리연탄의 상표가 가진 힘과 우수한 품질을 앞세운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삼천리는 적극적으로 협상을 벌여 1973년 6월 4일 오류공장을 인수했다. 이로써 삼천리의 생산공장은 이문공장을 비롯해 수색공장, 시흥공장, 오류공장 등 4대 기간공장 체제가 확립되었다.

3. 영업 및 판촉활동의 본격적 전개

영업조직의 기능 강화

연탄파동 이전의 연탄시장은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공급자 중심의 시장이었다. 이런 구조에서는 굳이 영업활동을 강화할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에 연탄업체들은 영업력을 높이거나 서비스를 개선하기보다는 생산량을 늘리는 데 더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삼천리는 1964년 무렵부터 영업 전담 조직을 운영하며 영업활동에 힘을 쏟았다. 각 공장의 업무과내에 판매전담반을 운영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1965년에는 판매대행소 5곳을 설치하는 등 일선 판매조직을 체계화하여 운영했고, 1966년에는 판매전담반을 판매계로 확대 개편하여 판매조직으로서의 기능을 강화했다.
그런데 1966년 발생한 연탄파동 이후 영업환경에 변화가 생겼다. 석탄산업 전체가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연탄공장의 수가 급감했다. 살아남은 업체들도 그동안 투자해 놓은 생산시설을 가동하는 것만도 힘들 정도의 고충을 안게 되었다. 이는 과거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영업활동에 나서야 하는 요인이 되었다.
1968년 삼천리는 이문공장 가동을 계기로 판매계직원을 내근과 외근 담당으로 구분하여 영업활동을 강화했다. 내근자는 판매전표와 배차관리를 맡고 외근자는 시장관리와 판촉활동을 맡았다. 소비자에게 직접 다가가는 마케팅 영역으로 업무를 확장한 것이다.
연탄 업계의 경쟁이 가열되던 1971년에는 보다 체계적으로 영업활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본사에 영업과를 신설했다. 영업과의 주요 업무는 영업활동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 정리하여 연간 판매계획을 수립하고 지역별 판매조직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정확한 판매계획 수립을 위해 시장조사를 실시하고 경쟁 상황을 파악하는 업무도 수행했다.
1973년에는 중동에서 발생한 제1차 석유파동을 계기로 석탄 및 연탄산업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석유류 가격 폭등으로 연탄 소비가 급증하면서 연탄파동이 재연되었고, 정부 정책도 그동안의 주유종탄 정책에서 주탄종유(主炭從油) 정책으로 회귀했다. 서울시는 연료난 극복을 이유로 서울 지역에서 생산되는 연탄의 시외 반출을 금지하는 조치를 시행하기도 했다. 자연히 영업 현장에서는 출고증을 발행하는 등 한층 세심한 판매관리가 필요해졌다.
1975년에는 ‘석탄수급조정에 관한 임시조치법’이제정돼 ‘연탄판매소 등록제’가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판매대행소 제도가 사라지고 연탄 판매 과정이 생산자-판매소-소비자로 이어지는 수직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삼천리는 대행소 체제를 폐지하고 지역별로 담당 직원을 두는 직접관리 방식으로 전환했다. 당시 삼천리는 서울시내 7,000여 개소의 판매소 가운데 2,400여 개의 판매소를 확보하고 있었다.

광고홍보 및 판촉활동 개시

연탄 시장이 만들면 팔리던 단계에서 경쟁의 단계로 진입하면서 달라진 풍경 가운데 하나는 마케팅이었다. 제품의 품질과 상표, 기업의 이미지와 인지도, 그리고 중간판 매상과의 관계 등이 경쟁의 변수로 등장함에 따라 판촉활동에 점차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삼천리는 삼천리연탄의 우수한 품질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68년 처음으로 광고영화를 제작해 서울 시내 주요 극장에서 상영했다. 1973년부터는 라디오 방송용 CM을 제작해 동아방송(DBS), 동양방송(TBC), 문화방송(MBC)의 주부 대상 프로그램을 통해 광고했다. 이 CM은 ‘언제나 변함없는 삼천만의 연료, 삼천리연탄’이라는 콘셉트로 제품 광고와 기업이미지 홍보를 곁들여 제작되었다. 이때부터 ‘삼천만의 연료’라는 카피는 삼천리연탄을 상징하는 문구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미디어를 통한 광고홍보 활동 외에 삼천리가 역점을 둔 대표적인 판촉 활동으로는 ‘연탄판매인 탄광 견학’이라 부르는 체험형 연수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연탄판매점 점주들에게 삼척탄좌의 탄광을 직접 견학하게 하여 삼천리연탄의 우수성을 알리고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를 향상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장균 사장의 지시로 1972년 4월부터 실시되었는데, 삼천리연탄의 우수성뿐 아니라 판매점과 협력관계를 증진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1968. 삼천리 광고 제작
삼천리 연탄 홍보물

수송 전담회사 <삼천리운수>의 설립과 합병

연탄의 원재료인 원탄은 운반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완제품인 연탄도 상대적으로 부피가 크고 깨질 우려가 있으며 다소 무겁다는 특성이 있다. 이 때문에 연탄의 생산과 판매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수송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특히 수요가 폭증하는 겨울철에는 적기에 저탄장에서 공장으로 원탄을 수급하고 생산된 연탄을 소비지에 신속하게 공급할 수 있도록 수송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요소였다.
삼천리는 1957년 처음으로 트럭을 임차하여 원탄 수송에 활용했고, 그 이후 트럭을 구매하기 시작하여 1960년대 말에는 본사에 수송과를, 각 공장에 차량반장을 두어 관리해야 할 정도로 차량의 수가 증가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판매지역이 광역화함에 따라 수송 업무가 더욱 중요해졌다.
그런데 1971년부터 자가용 차량을 이용한 영업활동을 금지하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이에 삼천리는 수송 전반의 업무를 전담할 별도의 운수회사를 설립하기로 하고, 1972년 8월 수송부문을 독립시켜 <삼천리운수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본사는 이문공장 내에 두었다.
설립 이후 삼천리운수는 사고예방, 원가절감 등에 노력하여 수송 관리의 합리화와 시장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후인 1977년 11월 경영합리화 차원에서 삼천리에 흡수 합병되었다.

1977.11.01. 삼천리운수 흡수 합병

4. 시장점유율 1위 달성

설비 증설과 생산성 향상

삼천리는 이문공장 준공 이후에도 더 많은 연탄을 생산·공급하기 위해 생산설비 증설을 계속했다. 특히 이문공장에 1968년 7월 최초로 중탄윤전기를 설치하고 이듬해인 1969년에는 7대의 윤전기를 증설하는 등 설비 대형화를 추진했다. 1970년 4월에도 최초의 대탄윤전기를 비롯한 10대의 윤전기를 추가로 증설했다. 1976년 2월에는 수색공장과 시흥공장에 소탄용 3탄식 윤전기를, 1977년에는 시흥공장에 소탄용 쌍탄식 윤전기를 증설했다.
지속적인 설비 투자 결과 삼천리의 생산능력은 크게 높아졌다. 그러나 설비 증설에도 불구하고 급증하는 수요를 충족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무한정 생산설비를 늘릴 수도 없었다. 결국 밀려드는 주문량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매우 시급했다.
삼천리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많은 연구를 진행했다. 하지만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이장균 사장이 관계자들에게 생산시설을 늘리지 않고도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특별히 지시하기도 했지만 마땅한 해법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때에 이장균 사장의 아이디어가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전환점을 만들었다. 이장균 사장은 열차를 타고 부산 출장을 가던 중에, 정차했던 열차가 가속할 때 내는 바퀴소리를 듣고 윤전기의 회전속도를 높이는 아이디어를 착안했다.
이장균 사장은 이 아이디어를 생산현장의 책임자들에게 제안했다. 현장 책임자들은 고속회전으로 인해 자칫 윤전기가 손상되거나 불량품이 양산되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열처리 강도 제고 방안 등을 연구·검토했다. 연구·검토를 마친 후에는 현장에 적용하여 윤전기의 회전속도를 높이는 실험을 실시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분당 19개였던 윤전기 1대의 생산량을 최대 60개까지 높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삼천리는 즉시 전 공장에 이를 적용하여 생산량을 늘려갔다.
윤전기 회전속도의 고속화 아이디어는 추가 증설을 하지 않고도 무려 70%에 달하는 생산성 향상 효과를 가져왔다. 이는 1970년대 중반 이후 삼천리가 시장 개척에 더욱 속도를 내며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972.09. 시흥공장 제탄윤전기

시장점유율 1위 등극

법인 전환 이후 적극적인 시장 개척과 영업활동, 지속적 설비 증설, 그리고 생산성 향상에 노력한 결과 삼천리의 생산실적은 빠르게 개선되었다. 1966년에 17만 톤 규모이던 생산실적이 3년 후인 1969년에는 45만 톤으로 급증했다. 이후에도 1973년에는 100만 톤, 1975년에는 150만 톤, 그리고 1978년에는 190만 톤을 돌파하며 급격히 늘어났다.
공장별로 보면, 이문공장은 1968년 11만 톤, 1972년 48만 톤, 1978년에는 74만 톤을 기록해 삼천리 전체 생산량의 40% 가까이를 담당했다. 삼천리 법인 편입 첫해인 1969년에 9만여 톤에 머물던 시흥공장도 1978년에는 30만 톤으로 증가했다. 인수 당시 8만여 톤에 머물며 판매부진에 시달렸던 오류공장 역시 삼천리의 네 번째 공장으로 편입된 이후 생산량이 증가해, 1974년에는 21만 톤, 1978년에는 44만 톤으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시장점유율도 빠르게 높아졌다. 1967년만 해도 압도적인 1위였던 삼표연탄(31.5%)과 한성연탄(7.2%)에 이어 6.4%로 3위의 시장점유율에 머물렀지만, 이듬해인 1968년에 8.0%를 기록하며 단숨에 업계 2위로 올라섰다. 삼천리의 상승세는 더욱 탄력을 받아 1969년에는 처음으로 시장점유율 10%를 돌파했고, 1974년에는 멀게만 보였던 20%대에 올라섰다.
그리고 1978년. 삼천리는 서울 지역 연탄 시장에서 25.2%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삼표연탄을 제치고 마침내 업계 정상의 자리에 올라서는 데 성공했다. 광고에서의 콘셉트 그대로 ‘삼천만의 연료’라 불러도 손색없는 위상을 갖게 된 것이다.
판매실적이 증가함에 따라 매출액도 역시 대폭 늘어났다. 법인 전환 첫해에 4억 원에 그쳤던 매출액은 제4기(1969. 7 ~ 1970. 6)에 10억 원을 돌파했고, 10년 차인 제10기(1975. 7 ~ 1976. 6)에는 매출 100억 원을 돌파해 파죽지세의 성장세를 실감하게 했다. 이후에도 삼천리의 성장세는 계속돼 1978년(1977년부터 1~12월로 회계연도 기준 변경)에는 294억 원의 매출실적을 기록했다.
삼천리는 순이익 측면에서도 놀라운 기록을 이어갔다. 제1기(1966. 7 ~ 1967. 6)에 871만 원의 순이익을 올리며 법인 전환 첫해에 흑자를 기록한 이후 매년 흑자를 이어갔다. 이때 시작된 흑자 행진은 2025년 현재까지도 이어져, 우리나라 기업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창립 이후 70년 연속 흑자’의 출발점이 되었다.

기차에서 얻은 생산성 혁신 아이디어

삼천리가 연탄 사업을 시작한 초기에 획기적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은 우연찮게도 기차 바퀴 덕분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차 바퀴 소리도 무심하게 흘려듣지 않은 이장균 선대회장의 섬세함 덕분이었다. 당시 연탄업계는 급증하는 수요에 대응하여 얼마나 많은 제품을 얼마나 우수한 품질로 생산하느냐가 성장의 관건이었다. 삼천리는 국내에서 가장 탄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삼척탄좌의 원탄을 독점으로 전량 구매하여 사용했기 때문에 연탄의 품질은 타사에 비해 월등하다 자부했다. 하지만 겨울철에 폭증하는 주문량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이장균 선대회장은 이문공장 공장장과 본사 생산과장을 불러 생산시설을 늘리지 않고 더 많은 연탄을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연탄을 만들기만 하면 팔리는데 공장이 좁아서 시설을 늘릴 수도 없으니, 기계의 생산성을 늘릴 방법을 연구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 지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공장에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지만 그 방법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부산으로 출장을 가던 이장균 선대회장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실마리를 찾아냈다. 정차했던 기차가 다시 출발하면서 서서히 속도를 높여가는 바퀴 소리에서 분당 회전율이라는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이장균 사장은 공장으로 전화를 걸어 윤전기의 회전속도를 최대한 높이라고 지시했다. 너무 빨리 가동시켜 기계가 고장이 난다거나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까지 하면서 생산성 향상을 독려했다.
각 공장에서는 이 지시에 따라 기계를 조금씩 빨리 회전시킴으로써 생산량을 늘리기 시작했다. 결국 삼천리는 아무런 증설을 하지 않고도 약 70%의 생산성 증대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덕분에 삼천리는 1970년대 중반 무렵부터 시장 개척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또 1976년에는 쌍탄식 윤전기 등 성능이 개량된 윤전기를 각 공장에 설치, 가동하여 획기적인 생산량 중대를 이루어냈다.
생활 속에서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작은 힌트도 놓치지 않고 업무에 적용함으로써 삼천리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이는 이장균 선대회장과 1970년대의 연탄공장이 가르쳐 준 소중한 교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