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이야기

70년 이야기

도시가스사업의 성장과
에너지 전문기업으로의 진화 

1993 ~ 2007 

Section 1

21세기를 향한 신경영체제 출범

1. 1990년대의 에너지산업 환경

자유무역과 시장개방 가속화

한국경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 등 이른바 3저(低)의 호재에 힘입어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큰 호황을 누렸다. 덕분에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한국경제는 연평균 12.1%의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했고 실업률도 4.0%에서 2.5%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 이후 한국경제의 성장세는 급격히 둔화되고, 1990년대 들어서는 무역수지가 적자를 기록할 정도로 침체했다. 1993년 출범한 문민정부는 경기 활성화를 위해 ‘신경제 100일 계획’과 ‘신경제 5개년 계획’ 등 다양한 경기부양책을 쏟아냈다. 하지만 수출은 갈수록 저조했고 기업들의 설비 투자 역시 부진을 면치 못했다. 결국 1990년에 22억 달러 적자를 보인 무역수지는 1996년에는 적자 규모가 237억 달러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세계 경제의 개방화 추세가 가속화하며 국산 상품의 국제경쟁력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1993년 12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타결되고 1995년 1월 1일 WTO(World Trade Organization, 세계무역기구) 체제가 출범하면서 시장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WTO는 기존의 GATT를 대체하여 상품·서비스·지적재산권 등 거의 모든 교역 분야에서 자유무역을 추구하며 각국이 무역장벽을 낮춰 원활하고 자유롭게 교역하도록 지원하는 국제기구이다.
WTO 체제의 출범으로 세계는 ‘총성 없는 전쟁’이라는 무한경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1993년 11월 유럽연합(EU)이 탄생하고 1994년 1월 유럽경제지역(EEA)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하는 등 경제블록화가 촉진되었으며, 특정 국가 간의 자유무역협정(FTA)도 점차 활발해졌다.
자국 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시장개방에 소극적이었던 우리나라도 WTO의 출범과 1996년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계기로 시장개방을 속도감 있게 추진했다. 이에 따라 외국인 투자와 금융시장이 개방되고 비관세 장벽이 철폐되었으며, 유통, 통신 등 서비스업 부문에서 외국 기업의 진출이 허용되었다. 또 농업, 섬유, 공산품 등 다양한 부문의 무역자유화가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안방이라 할 수 있는 내수시장에서조차 강한 경쟁력을 가진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는 정부의 보호막이 한 꺼풀 사라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여서, 수출기업뿐 아니라 내수 중심으로 사업하던 기업들도 경쟁력이 없는 사업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새로운 환경과 마주하게 되었다.

지구온난화에 대응한 국제사회의 환경 규제

시장개방과 함께 1990년대 세계 경제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흐름은 환경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지구온난화 문제가 국제사회의 현안으로 떠올라 환경 규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국제사회의 공조가 이루어진 것이다.
1990년 국제사회는 몬트리올의정서를 개정하여 오존층 파괴 물질의 규제를 확대했다. 1992년 6월에는 전 세계 185개국 정부 대표단과 114개국 정상 및 정부 수반들이 참석한 가운데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를 개최했다. 거의 모든 국가가 참여한 탓에 ‘지구정상회의’라고도 부르는 이 회의에서 참가국들은 지구온난화 방지를 목적으로 기후변화협약, 즉 ‘기후변화에 관한 유엔 기본협약(UNFCCC)’을 채택했다. 이 협약은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지목된 이산화탄소의 배출 규제를 주요 과제로 다루고 있다.
참가국들은 지구환경 보전을 위해 ‘리우 선언(환경과 개발에 관한 리우 선언)’도 채택했다. 리우 선언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27개 기본 원칙을 담은 국제 선언으로, 그동안 개별적으로 추진되던 환경 관련 정책들이 하나로 통합되고 국제사회의 협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997년 12월에는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3차 UNFCCC 당사국총회에서 기후변화협약의 구체적인 이행 방안을 담은 교토의정서가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 EU, 일본 등 37개 나라가 의무 이행 대상국으로서 2008∼2012년까지의 제1차 감축 공약 기간에 온실가스 총배출량을 1990년 수준 대비 평균 5.2% 감축해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
이처럼 1990년대는 국제사회에서 환경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시기로, 여러 가지 환경 규제가 도입되면서 국가 차원뿐 아니라 개별 기업들도 기후변화와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응하는 성장전략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분야는 에너지 분야였다. 기후변화에 대한 국제적 규제가 강화되고 온실가스 감축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환경친화적인 방향으로 에너지 정책을 전환하고 석탄과 같이 탄소배출이 많은 에너지는 퇴출하는 방향으로 에너지 정책을 추구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에너지 효율화를 위한 구조조정들을 추진하면서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을 펼쳐 석탄 의존도를 낮추고자 했다. 효율이 낮은 탄광부터 연속적으로 폐쇄하고, 화력발전소 등 각종 산업시설의 석탄 사용 비중도 낮춰갔으며, 도시가스 네트워크를 대규모로 확충하여 주요 도시뿐 아니라 중소도시와 농촌지역으로도 도시가스 보급을 확대했다. 이에 따라 도시가스는 가정 및 산업용 에너지원으로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2. 이만득 회장 취임과 새로운 변화의 시작

이만득·유상덕 회장 취임

1990년을 전후한 시기에 삼천리는 그동안의 주력사업이었던 연탄 사업을 축소 조정하고, 새로 진출한 도시가스 사업의 성장 기반을 공고히 구축하며, 경쟁력 있는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하는 등의 많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 과제들은 모두가 삼천리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중대한 것들이어서, 사실상 전환기에 선 삼천리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경영을 펼쳐가야 했다.
이러한 때에 삼천리의 리더십에 변화가 생겼다. 유성연·이장균 선대회장에 이어 삼천리를 이끌었던 인현철 회장이 퇴임하고, 1993년 2월 26일 이만득 회장과 유상덕 회장이 각각 ㈜삼천리와 ㈜삼탄(삼척탄좌의 새 이름)의 회장으로 동시에 취임했다. 이에 따라 삼천리는 이만득·유상덕 회장을 쌍두마차로 하는 새 시대를 열게 되었다.
이만득 회장은 1981년 미성상사 LA지사장으로 입사한 후 삼천리열처리 이사, 삼천리 상무 및 부사장을 거쳐 1992년부터 삼천리 부회장으로 재임해 왔다. 유상덕 회장도 1986년 미성상사 LA지사장으로 입사해 삼척탄좌 전무이사와 부회장을 역임했다. 두 사람은 1987년에 그룹 기획실에서 함께 근무하면서 삼천리의 미래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왔고, 1992년부터는 부회장으로 나란히 승진해 각각 독립된 영역에서 경영자로서의 능력을 키워 왔다.
젊고 역동적이며 한편으로는 사업적 혜안이 뛰어난 두 최고경영자의 등장으로 삼천리는 심기일전하여 재도약의 채비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창립 40주년을 앞둔 삼천리의 제2기가 시작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만득·유상덕 회장 앞에 놓인 과제는 만만치 않은 것들이었다. 특히 삼천리가 커다란 전환점에 놓여 있어 이만득 회장의 리더십이 매우 중요해졌다. 당시 삼천리는 창업 이래 고속 성장을 계속해 온 연탄 사업이 급격하게 사양화의 길을 걷고 있었고, 새로운 주력사업으로 성장한 도시가스 사업에는 여전히 막대한 투자가 필요했다. 또 사업다각화 차원에서 시작한 신규 사업들도 기대만큼 성적을 내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어 대안이 시급했다. 따라서 회사의 성장을 이끌어갈 주력사업의 기반을 보다 굳건히 하고 21세기에 펼쳐갈 신규 사업에 대해 적극적인 연구와 검토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이만득 회장은 취임사를 통해 “그룹의 제2 창업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때”라고 강조하고, 조직 풍토의 활성화, 신규 사업 본격 추진, 인재 육성, 책임경영체제 확립 등 네 가지를 경영방침으로 제시했다. 이 4대 경영방침은 이후 삼천리의 재도약을 이끄는 나침반이 되었다.

1993.02.26. 이만득 회장 취임식

이만득 회장 취임사

존경하는 두 분 명예회장님, 그리고 관계사 사장님과 임직원 여러분을 모시고 오늘 여러모로 부족한 제가 회장으로 취임함에 있어 기쁨보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아울러 삼천리그룹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으신 관계사 사장님과 임직원 여러분, 그리고 오늘의 우리 그룹이 있기까지 성장의 기틀을 마련해주신 많은 퇴직 임직원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중략)
이제 우리는 전환기를 맞이하여 삼천리가족 모두가 새로운 정신자세로 그룹의 제2 창업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현재의 상황과 앞으로 다가올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경영방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조직풍토의 활성화입니다. 활성화 방안의 일환으로 업무개선실을 신설하여 전사적인 전산화 작업과 지속적인 업무개선을 추진함으로써 ①모든 분야에서 군살과 낭비요인을 과감히 제거하여 효율의 극대화를 도모하고, ②의사결정 채널을 단축하여 급변하는 환경에 신속히 대처하며, ③조직 구성원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여 조직의 자율성을 제고시킬 것입니다. (중략)
둘째, 신규 사업의 본격 추진입니다. 지난 수년간 정체 상태에 있는 외형의 성장을 위한 신규 사업으로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자산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고 수익 증대를 가져올 수 있는 유통사업에 본격 진출할 것이며, 기술연구소의 활성화를 통하여 활성탄과 관련된 환경사업에 적극 참여할 것입니다. 또한 기존 사업 분야에서는 도시가스를 중심으로 한 에너지사업과 성장 잠재력이 무한한 건설업 및 공장 이전으로 도약의 기반을 마련한 기계 공업이 2000년대의 주력사업이 되도록 적극 지원, 육성하겠습니다.
셋째, 인재의 육성입니다. 저는 앞으로 여러분들이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우수한 인력의 채용에서 양성에 이르기까지 공정하고 합리적인 인사 운영과 양질의 교육 기회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고 부서 간 및 나아가 회사 간 인사 교류를 통해 다양한 직무 경험을 하게 하여 인적 자원의 수준을 높이고 인간 본위의 기업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하겠습니다.
넷째, 책임경영체제 확립입니다. 우리 삼천리가 보다 나은 기업으로 성장,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이익 창출을 통하여 우리 모두의 복지를 구현함과 동시에 사회적 책임을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과제는 저의 혼자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며, 무엇보다도 임직원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조와 성원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스스로 주인이 되어 새로운 의욕과 자신감으로 신바람 나는 직장 분위기를 조성할 때 비로소 도약의 고동은 힘차게 울릴 것이며, 제2의 창업은 서서히 우리 곁에 다가올 것입니다. (후략)

‘동업정신’의 계승 및 신경영체제 출범

창업 2세인 이만득·유상덕 두 회장의 취임은 여러모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업계뿐 아니라 일반 국민 사이에서도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찬사를 받는 유성연·이장균 두 창업자의 동업 정신이 40여 년이 흐른 뒤에도 자손들에 의해 변함없이 유지되었다는 점이 큰 관심을 모았다.
일례로 1993년 3월 15일 자 조선일보는 “동업 2세… 사업다각화 돌입”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두 집안은 친핏줄 이상 끈끈하다”며, “우리는 젊기 때문에 선의의 경쟁은 하겠지만 부친들이 그랬듯 돈 때문에 정과 의리를 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두 신임 회장의 의지를 전하기도 했다.
이만득·유상덕 회장은 취임과 동시에 각자의 역할을 명확히 했다. 이만득 회장은 ㈜삼천리, 삼천리주택, 삼천리열처리, 삼천리기계 등 4개 사를 책임경영하고, 유상덕 회장은 1993년 2월 24일 삼척탄좌에서 사명을 변경한 ㈜삼탄을 비롯해 한인니자원개발, 삼천리제약, 미성상사의 경영을 책임지기로 했다. 조선일보가 표현한 대로 ‘한 지붕 두 가족’ 형태로 책임경영을 추구하여 제2 창업 수준의 도약을 이뤄내겠다는 각오였다.
다만, 4개 회사씩 분담하여 책임 경영한다는 방침에도 불구하고 인사, 승진, 신규사업, 자금 운영, 그룹 규정 등의 현안은 통합 운영하기로 했다. 유성연·이장균 두 선대회장이 40년 가까이 이어 온 동업 정신을 발전적으로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그룹 공통의 경영과제는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여 함께 풀어간다는 의미였다.
이만득·유상덕 회장의 이러한 방침은 ‘2세로 이어지면 동업은 깨진다’는 세간의 속설과는 달리 핏줄 이상의 우정을 중요한 덕목으로 실천하는 삼천리만의 동업 정신을 구현한 것이라는 게 업계 안팎의 평가였다. 언론 등에서도 “또 다른 아름다운 동행의 시작”이라는 말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으며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동업 관련 언론보도

3. 경영혁신을 통한 조직 역량 강화

HOPE-30 경영혁신의 전사적 전개

이만득 회장은 취임사를 통해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이를 위해 조직풍토 활성화, 신규 사업 적극 추진, 인재 육성, 책임 경영 체제 확립 등 4대 경영방침을 표명했다. 경영방침 중에서도 조직 풍토 활성화를 가장 먼저 제시한 것은 조직에 활력을 넣어야 미래를 향해 힘차게 전진할 수 있는 체질을 갖출 수 있고, 그러한 체질이 갖춰져야 도약의 새 시대를 열어갈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이 같은 구상에 따라 삼천리는 1993년의 중점과제를 ‘새로운 삼천리의 구축’으로 정하고, 전사 차원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대대적인 경영혁신을 전개하기로 했다.
먼저 1993년 4월 의식 및 행동의 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가정애·직장애’라는 삼천리 정신을 실천하는 ‘HOPE-30 운동’을 시작했다. HOPE는 Headquarters(경영본부), Office(업무현장), Productivity(생산성), Evaluation(평가)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며, ‘30’은 남보다 30분 먼저 일하기, 남보다 30% 더 일하기, 남보다 30% 덜 쓰기를 의미하는 숫자였다. 삼천리가 의식개혁 운동을 먼저 시작한 것은 경영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경영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전 임직원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삼천리는 1993년 4월 29일부터 이틀 동안 본사 및 각 공장에서 ‘HOPE-30 운동 추진 결의대회’를 갖고 전사적인 실천 운동에 돌입했다. 임직원들은 결의문을 통해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요소를 과감히 척결하고 새로운 삼천리를 창조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삼천리는 HOPE-30 운동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해 각 분기마다 중점적으로 실행할 실천과제를 하나씩 선정하여 추진했다. 1993년 2/4분기에는 ‘클린 오피스 생활화’, 3/4분기에는 ‘보고 및 결재의 효율화’, 4/4분기에는 ‘회의 및 협의의 효율화’와 같은 방식이었다. 매 분기 말에는 해당 과제에 대한 성과를 종합적으로 점검하여 우수 부서를 시상했다.
혁신운동의 추진과정을 널리 공유하고 실행력을 제고하기 위해 1993년 7월 1일 “HOPE-30 운동 소식”이라는 책자를 발행하고, 8월 2일에는 처음으로 ‘제안의 날’ 행사를 실시했다. 연말을 맞아 12월 18일에는 ‘HOPE-30 운동 사례 발표회’를 열어 우수사례를 공유하고 우수부서에 대한 시상도 했다. 1994년 9월 30일에는 ‘전사 HOPE-30왕 선발대회’를 갖기도 했다.
1994년 이후 HOPE-30 운동은 삼천리의 비효율과 관습을 타파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조직문화를 조성하는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매주 회의 없는 날, 용모 단정의 날, 소집단 활동의 날, 가정의 날, 제안의 날, 정리의 날 등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과제를 선정해 중점적으로 실천하는 생활 개선 운동으로 발전했다. 그 결과 HOPE-30 운동은 삼천리의 동료의식을 함양하고 조직 풍토를 쇄신하는 의미 있는 동력이 되었다.

1993.04.29. HOPE-30 운동추진 결의대회
1993.04. HOPE-30 운동 포스터
1994.09.30. HOPE-30왕 선발대회

경영환경 변화에 대응한 조직 혁신

삼천리는 의식개혁 운동과 더불어 조직 효율화에도 박차를 가했다. 먼저, 1993년 3월 유통사업본부를 신설하고 무역사업본부를 폐지하며, 연탄공장 조직 축소, 비서실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전체 조직은 4개 사업본부, 1개 연구소, 6개 공장 및 지사, 34개 부와 팀·실, 40개 과 및 담당 체제로 재편되었다.
이듬해인 1994년 8월 1일에는 중국 코크스 합작공장 건설 및 현지사무소 개설을 계기로 해외지사 관리규정을 제정했다. 이어 10월 1일에는 회장 직속으로 기획조정실을 설치하고, 산하에 기획팀·경영관리팀·신규사업팀을 두어 전략기획 기능을 대폭 강화했다. 기획조정실은 경영환경 변화에 대응한 미래 사업 연구와 회장의 역할 확대에 따른 지원 및 보좌 기능을 담당했다.
1995년 1월에는 관리본부를 경영지원본부로 변경하여 현업에 대한 지원 역할을 강화하도록 하고, 해외사업부를 연탄화학사업본부에 통합했다. 또 1996년에는 도시가스사업부 조직을 개편하여, 경기지사와 경인지사로 운영하던 지역조직을 인천·부천·안산·안양·수원·평택 등 6개 지사 체제로 세분화했다.
1990년대 후반 들어서는 사업구조조정 작업이 활발해지면서 조직개편도 수시로 이루어졌다. IMF 외환위기로 인해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던 1998년 2월 1일에는 도시가스본부의 6개 지사를 4개 지사로 통폐합하여 조직을 슬림화했다. 이에 따라 인천지사는 인천 지역을, 경기서부지사는 부천·안산·시흥 지역을, 경기중부지사는 광명·군포·의왕·안양 지역을, 경기남부지사는 수원·용인·오산·평택·안성·화성 지역을 각각 담당하게 되었다.
이날 조직개편에서는 기획조정실을 폐지하고 사장 직속 비상설 기구로 안전관리위원회와 기술위원회를 새로 설치했다.
1999년 5월 10일에는 외환위기 상황에서 신속한 의사결정으로 대응력을 높이고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취지에서 1985년 이후 시행해 온 사업본부제를 완전 폐지했다. 대신에 업무단위별 본부제를 도입해 전사 조직을 기획본부·경영지원본부·영업본부·기술본부로 개편했다. 또 본부 산하에 전면적으로 팀제를 도입해 의사결정 단계를 팀-담당-본부의 3단계로 축소했다. 이에 따라 전사 조직은 4개 본부, 6개 담당 및 연구소, 27개 팀으로 대폭 단순화되었다. 다만 외환위기의 긴박했던 고비를 넘긴 1999년 9월에는 사장 직속으로 전략사업팀을 신설하여 중장기 전략사업계획 수립 및 추진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경영환경의 변화와 사업전략의 추진과정에 맞춰 적절하게 조직을 개편하여 운용함으로써 삼천리의 조직역량은 한층 더 강해졌다. 이러한 조직역량은 삼천리가 종합에너지기업을 목표로 제2의 창업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2000.09.01. 삼천리도시가스 인천지사

삼천리 통합정보시스템 개발

삼천리는 업무능률 향상을 위해 정보화 작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특히 1993년부터는 도시가스 사업의 안전 확보와 업무 효율화를 위해 매핑(Mapping) 시스템을 단계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1995년에는 이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켜 본격적인 GIS(지리정보시스템) 구축에 착수했다.
1997년 들어 삼천리는, 기존의 전산화가 경영전략·조직·프로세스·정보기술이 상호 연계된 ISP (Information Strategy Planning) 기능이 부족하고 운영효율성이 떨어져 통합된 경영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이 미흡하다고 보고,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여 통합된 경영정보시스템을 구축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98년 초 삼천리는 기존에 추진했던 MIS(경영정보시스템), GIS(지리정보시스템), 빌링시스템 등 각종 정보시스템을 통합하고 단일화하여, 각종 정보의 전사적 활용도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통합정보시스템(SICOMS, Samchully Integrated Communication & Management System)을 구축하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먼저 79개 단위업무에 대한 업무 프로세스를 분석 및 정리하고, EIS(임원정보시스템), 사업계획 편성 관리 시스템, 비용 및 투자예산 관리 시스템, 수요개발 관리 시스템 등을 새로 구축했다. 또 격월 검침 시스템을 시행하고 GIS를 사용자 중심 체제로 보완하여 현장 직원의 사용 편의를 높였고, 시설물점검 관리 시스템을 개선하는 등 MIS의 지속적인 보완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99년에는 PDA를 도입하고 검침 시스템을 새로 개발했다. 또 미국으로부터 선진 시스템을 도입해 기존의 GIS를 개선한 삼천리 고유의 신시설물 정보시스템(NGIS)을 개발, 2000년부터 업무에 적용했다. 이어 ISP 수립 및 통합정보시스템 구축을 추진하여 2002년 9월 ‘삼천리 통합정보시스템(SICOMS, Samchully Integrated Communication & Management System)’을 구축 완료했다. 이에 따라 삼천리는 요금, 고객, 경영관리 등 각 부문에서 탁월한 업무 개선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자금 업무, 경영실적 분석, 원가 산정 등의 부문에서도 데이터 연계성이 향상돼 업무 효율을 크게 높이게 되었다.
한편, 1998년 10월 1일 삼천리는 인터넷 시대를 맞아 고객과의 소통을 확대하기 위해 회사 대표 홈페이지(www. samchully. co. kr)를 구축해 오픈했다. 홈페이지에는 회사 소개, 도시가스, 연구개발, 사회활동, 고객마당 등의 메뉴를 두고 풍부한 콘텐츠를 다채롭게 구성해 고객과의 소통 채널을 확대했다.

4. ‘종합에너지 전문기업’ 비전 수립

비전 수립 및 추진전략 구체화

이만득 회장 취임 이후 삼천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명확한 사업전략과 목표를 설정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제2의 창업을 향해 전 임직원이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모으는 데는 부족함이 있었다. 임직원의 동기를 유발하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1997년 가을 무렵 삼천리는 ‘선택과 집중’에 입각한 새로운 중장기 목표를 수립하여 모두가 공유하는 비전을 수립하기로 했다.
당시 한국경제는 경제 위기의 전조가 드리우며 혼란이 극심한 상황이었다. 거의 모든 기업이 비상경영을 선언하고 긴축경영에 들어갔다.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업 경쟁력을 높이고 경영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삼천리는 ‘비전 중심의 경영’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목표 달성을 위한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임직원이 공유하는 비전(Vision)을 수립하기로 했다. 그리고 1997년 가을 무렵 TF를 구성해 미래 비전의 밑그림을 그린 다음 1998년 초 비전추진사무국을 설치해 본격적인 비전 수립 작업에 착수했다. 1차 초안을 만든 후에는 글로벌 경영컨설팅 그룹인 아더앤더슨(Arthur Andersen) 컨설팅에 의뢰하여 약 10개월 동안의 검증 과정을 거쳤다.
아더앤더슨 컨설팅은 경영환경, 사업구조, 기업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삼천리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고 미래 전략을 마련하여 비전 및 중장기 전략 최종 보고서를 제출했다. 삼천리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다시 내부 논의를 거쳐 1999년 9월 ‘21세기 종합에너지 전문기업’이라는 비전을 수립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추진 전략은 다음과 같이 설정했다.

  • 인수합병을 통한 소매시장 진출 확대
  • LNG 도입 및 도매시장 진출을 통한 도시가스 사업의 수직적 통합
  • 삼천리 공급권역 내 경제성 있는 집단에너지 사업 참여
  • 전력사업 구조 개편을 계기로 권역 내 배전사업 진출

비전 및 추진 전략을 통해 삼천리는 에너지 중심의 사업구조를 가진 ‘종합에너지기업’을 미래의 모습으로 설정했다. 이미 주력사업으로 영위하고 있는 도시가스뿐 아니라 가스산업과 연관성이 높은 지역난방, 배전 등의 분야로도 진출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삼천리의 비전과 추진 전략은 시기적으로 정부의 에너지산업 구조 개편 작업과 맞물려 있어 정부 정책 및 시장 상황의 변화에 따라 2000년과 2001년 두 차례 수정되었다. 특히 2001년의 2차 수정에서는 e-비즈니스 사업을 전략사업에서 제외하고 집단에너지 사업은 열병합 발전 사업으로 확대 추진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비전 달성의 동력 확보를 위한 조직 정비

삼천리는 비전 실현을 위한 추진력을 확보하기 위해 비전 선포에 즈음하여 조직을 일부 개편했다. 먼저, 2000년 1월 전략사업팀을 확대하여 사업개발본부로 개편하고 산하에 사업개발팀과 지역난방사업팀을 두어 에너지사업 확장을 위한 준비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8월 21일에는 일본에 도쿄지사를 개설해 신규사업 관련 정보 조사 등의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2002년에는 업무단위별 본부제로 운영하던 본사 조직도 직무별 담당제로 개편했다. 지사 조직은 경기총괄본부와 인천총괄본부로 나눈 후 그 산하에 4개 지역본부를 두어 운영하도록 개편했다. 다만 지역총괄본부는 2003년 3월 폐지되고 직무별 담당제도 2004년 5월 다시 본부제로 환원되었다.
한편, 삼천리는 다양한 신사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사원들의 전문성과 조직의 역량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저마다 능력 계발에 노력하고 사소한 아이디어도 존중하는 창의적인 조직문화를 만드는 노력을 병행했다. 일례로 2000년에는 1999년에 전산화한 제안제도를 더욱 활성화할 수 있도록 제안제도를 전자메일시스템과 연계하여 제안자들의 편의를 높였다. 또 학습조직제도를 도입해 조직 전반에서 상시적으로 연구하고 학습하는 풍토가 조성될 수 있도록 했다.
사내외 교육은 물론 해외연수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1996년 이후 매년 관련 인력을 일본 내 1·2위의 가스회사인 도쿄가스와 오사카가스에 기술연수를 보내 선진기술을 습득하도록 했다. 이들 회사에 파견된 기술인력들은 수요개발, 안전관리, 공사 관리, 기술교육, 에너지 진단 등의 연수를 받고 돌아와 삼천리의 사업역량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 창업자 유성연·이장균 선대회장 영면

석원 이장균 선대회장 타계

1997년 12월 13일 오전 9시 45분, 삼천리의 창업자로서 소규모 연탄제조업체에 불과하던 삼천리를 중견 그룹회사로 성장시킨 석원 이장균 선대회장이 향년 7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삼천리가 제2의 창업을 기치로 사업 체질을 강화하며 종합에너지기업으로 도약하던 시기에, 퇴임 이후에도 정신적 지주로서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던 창업자의 타계 소식은 그룹 전체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만득 회장이 경영을 맡아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며 삼천리를 도시가스업계 1위로 올려놓은 바로 그해에 닥친 비보여서 안타까움이 더 컸다.
이장균 선대회장의 삶은, 편리하고 질 좋은 생활연료를 더 많은 국민에게 공급하여 국민의 생활편의를 증진하고, 모범적인 동업의 모델을 실천하여 기업경영의 아름다운 역사를 써왔으며, 뜨거운 열정으로 삼천리그룹을 미래지향적인 에너지기업으로 성장시킨 도전과 개척의 여정이었다. 또한 전경련 이사, 연탄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산업경제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도 담당했다. 정부로부터 특히 1984년 3월 20일 제21회 상공인의 날에는 국가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기업인에게는 최고의 영예인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이장균 선대회장의 타계 소식은 삼천리 임직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계 전체에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언론에서는 “에너지산업 발전 외길인생”, “화합경영의 본보기”, 그리고 “재계의 큰 손실” 등의 표현을 써가며 이장균 선대회장의 타계 소식을 전했다.
1997년 12월 15일 자 매일경제는 이장균 선대회장의 일생을 조명한 기획기사에서 이장균 선대회장을 가리켜 “우리나라 자원산업의 창시자”로 표현했다. 또 “고인은 기업경영의 가치를 성실과 정직에 두었다”며 “일생을 신의와 화목으로 일관해 온 이 선대회장은 근면과 검소를 몸소 실천했다”는 말로 이장균 선대회장의 인품과 언행을 높이 평가했다. 변세화 시인은 추모시에서 “수신제가(修身齊家) 정명사상(正名思想) 사전관리 깨우쳐주시고 / 빚을 벗고 지우며 남에게 얻고 주며 살라시었네 / 가정 직장 공존공영 두루 살피신 참경영인이시어”라고 추모했다.
영결식은 1997년 12월 17일 삼성서울병원에서 삼천리그룹장으로 치러졌다. 이날 삼천리 임직원과 각계 인사들은 고인이 걸어온 값진 길을 되돌아보며 고인의 업적과 정신을 가슴에 새겼다. 이장균 선대회장은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운수리 유택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1997.12.13. 창업주 이장균 명예회장 타계

송은 유성연 선대회장 타계

2000년을 목전에 둔 1999년 3월 31일, 송은 유성연 선대회장도 향년 83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어갔다. 평생의 창업동지이자 피를 나눈 형제와도 같은 이장균 선대회장이 타계한 지 1년 4개월 만이었다.
이때는 유상덕 회장이 삼탄의 경영을 맡아 자원개발 사업을 확대하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때였다. 유상덕 회장은 유성연 선대회장의 뜻을 이어받아 외환위기 상황에서도 과감하게 도전하여, 인도네시아 파시르탄전 개발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21세기 세계적인 자원개발 기업으로 힘차게 나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전해진 비보는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유성연 선대회장은 45년 동안의 모범적인 기업인 활동을 통해 금탑산업훈장과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1999년 4월 1일 자 매일경제는 유성연 선대회장을 가리켜 “성실·정직·신용의 기업인상(像)”이라고 추모하기도 했다. 유성연 회장이 숙환 중에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쓴 자서전 “성실의 삶, 일진의 길”을 남겨 많은 이들에게 훈훈한 삶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
고인의 영결식은 1999년 4월 3일 삼성서울병원에서 삼천리그룹장으로 엄수되었다. 영결식에는 삼탄과 삼천리의 임직원뿐 아니라 고인의 따뜻한 마음과 고매한 품성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며 고인을 추모했다. 영결식 후 유성연 선대회장은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천안공원 묘원에 마련된 유택에 안장되었다.

1999.03.31. 창업주 유성연 명예회장 타계
1989.03.15. 유성연 회장 금탑산업훈장 수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