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이야기
도시가스사업의 성장과
에너지 전문기업으로의 진화
1993 ~ 2007
- Section 1. 21세기를 향한 신경영체제 출범
- Section 2. 에너지 전문기업으로의 사업구조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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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3. 경영효율화를 향한 사업구조조정
- 1. 47년 만의 연탄 사업 정리
- 2. 사업구조조정 통한 그룹 경쟁력 강화
- 3. 엔지니어링 회사 삼천리ENG 설립
- 4. ㈜삼탄, 글로벌 자원개발 전문기업 변신
- Section 4. 기술경쟁력 제고 및 전문인재 육성
- Section 5. New Vision 선포와 CSR의 확산
Section 3
경영효율화를 향한 사업구조조정
1. 47년 만의 연탄 사업 정리
연탄사업 구조 개편
이만득 회장은 그룹기획실에서 근무할 때부터 삼천리와 관계사들의 경영 현황을 깊이 있게 살펴보면서, 각 부문별 사업환경을 분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삼천리의 미래전략을 모색해 왔다.
회장 취임 이후에는 적절한 시기를 찾아 사업구조조정에 착수했다. 사업다각화 전략에 따라 추진해 온 신사업들의 성과와 과제를 면밀하게 점검하여 경영의 효율을 높일 수 있도록 사업구조를 재편하겠다는 복안이었다.
이는 ‘선택과 집중’의 전략으로 내실을 추구하여 삼천리의 미래를 재설계하겠다는 것으로, 삼천리의 능력과 경험에 비추어 성장 가능성이 크고 미래가 밝은 사업은 강화하되 그 성과가 미약하거나 장래가 불투명한 비주력 사업은 과감하게 철수한다는 방침이었다. 이는 조직의 체질을 강화하여 21세기 경영환경 변화에 대비하려는 포석이었다.
이에 따라 1993년 3월 삼천리는 국제화 시대에 대비하고 사업영역 다각화를 도모한다는 목적으로 1986년 4월 신설했던 무역사업본부를 폐지했다. 자체 수출품 생산이 없으면 수출입 대리점 기능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한계를 고려한 결정이었다. 1994년 8월 30일에는 건축자재 사업을 위해 1989년 12월에 설립했던 삼천리 에버우드도 정리했다.
창립 이후 줄곧 삼천리가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던 연탄사업도 불가피하게 정리 수순을 밟게 되었다. 연탄 사업은 1980년대 말 이후 산업 전체가 사양화되기 시작해 구조 개편이 불가피했다. 에너지 소비 형태가 변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저소득층이나 일부 상가 등 극소수를 제외하면 소비자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환경적인 문제를 유발하는 데다 연탄재 처리에도 불편이 많아 더 이상 사업을 영위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1992년 6월 30일 수색공장을 폐쇄한 바 있는 삼천리는 1995년 6월 30일 오류공장을, 1996년 10월 30일 천안 직산연탄공장을, 그리고 1997년 6월 30일에는 시흥공장을 차례로 폐쇄 조치했다. 이에 따라 1990년대 말 즈음에 삼천리의 연탄공장은 이문공장 하나만 남게 되었다. 1997년 기준으로 삼천리의 연탄 생산량은 8만 톤, 매출액은 32억 원이었다.
시흥공장·이문공장 직원들에게 양도
삼천리는 IMF 외환위기의 태풍이 물러가고 국가경제와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가던 2002년 1월 31일, 마지막 남은 이문공장도 폐쇄하고 연탄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47년 동안 이어 온 삼천리연탄의 장구한 역사가 마침내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삼천리가 다른 연탄공장을 폐쇄 조치하면서도 이문공장을 최대한 오래도록 운영하고자 한 것은,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부득이 연탄을 사용해야만 하는 일부 소비자들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 “연탄을 필요로 하는 고객이 있다면 마지막 한 사람에게까지 연탄을 공급하겠다”던 이장균 선대회장의 다짐을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이만득 회장도 연탄은 서민들에겐 ‘사랑의 온기 같은 것’이라며 이장균 선대회장의 신념을 계승하고자 했다. 창업의 뿌리이자 성장의 동력이었던 연탄사업을 정리하는 것은 많은 아쉬움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이만득 회장도 공장이 폐쇄될 때마다 안타까워하며 진한 아쉬움을 토로하곤 했다.
이러한 아쉬움은 사업을 정리하면서도 직원들과의 상생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승화되었다. 보통의 경우 공장이 폐쇄되면 직원들은 실직자가 되고 회사는 시설과 부지를 매각하여 투자금의 일부라도 회수하는 수순을 밟기 마련이다. 그러나 삼천리는 시흥공장과 이문공장을 폐쇄하는 과정에서 직원들과 연탄 고객을 배려하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한 직원들에게 공장의 운영권을 양도하여 상생의 길을 만든 것이다.
시흥공장의 경우 철도청 부지를 임대하여 공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공장을 폐쇄하면서 삼천리는 공장 설비 일체를 직원들에게 양도하고 철도청 부지도 계속 임대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덕분에 시흥공장 직원들은 실직하지 않고 직원들끼리 ‘고명산업’이라는 이름의 회사를 설립해 자체적으로 회사를 운영했다. 이문공장도 마찬가지였다. 삼천리는 오래도록 근무했던 직원들에게 삼천리 소유의 부지를 양도했다. 이문공장 직원들은 2002년 1월 ‘삼천리 E&E’를 설립해 연탄사업을 승계하여 연탄을 필요로 하는 소비자들에게 공급했다.
삼천리가 시흥공장과 이문공장을 직원들에게 양도한 것은 어느 기업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그야말로 전례가 없는 상생 조치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직원들에게는 생활의 터전을 마련해주고 연탄이 간절한 시민들에게는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게 해준 묘수이기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연탄과 동고동락한 사원들에게는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큰 선물이 되었다.
이로써 삼천리는 연탄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비록 연탄 사업에서는 철수했지만, 삼천리는 연탄 사업에서 못다 이룬 종합에너지기업의 꿈을 도시가스를 비롯한 또다른 에너지 분야에서 계승하여 계속 이어 나가기로 했다.
끝까지 ‘시민과의 동행’을 지킨 마지막 연탄공장
이문공장은 연탄사업을 하던 시절 삼천리를 대표하는 공장 가운데 하나로, 하루 200만 장의 연탄을 생산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공장이었다. 1970~80년대에 서울시민의 하루 연탄 사용량이 약 1천만 장이었다고 보면, 전체 사용량의 5분의 1을 담당한 셈이었다.
연탄은 산업화 시절에는 대표적인 연료로서 품귀 현상을 걱정한 정부가 사재기 단속에 나서던 때도 있을 만큼 큰 인기였다. 그러나 서울과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무연탄에서 가스로의 연료 현대화가 추진되고, 석유와 도시가스 등 대체 연료가 생기면서 서울시내 연탄공장은 하나둘 문을 닫게 되었다.
삼천리도 연탄공장을 차례로 정리했다. 그 중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 이문공장이었다. 삼천리는 연탄을 필요로 하는 서민들의 바람에 부응하고자 마지막까지 이문공장을 가동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와 더 이상 연탄공장을 운영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공장을 처분해야 했다. 이때 삼천리는 서민들의 연탄 수요에 부응하고 공장 직원들의 생계에도 도움을 준다는 취지에서 2002년 1월 이문공장을 공장 직원들에게 양도하는 방식으로 처분했다. 이는 서민들과 직원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큰 선물이 되었다.
이문공장은 2024년 들어설 때까지 하루 30만 장의 연탄을 생산해 수도권에 공급하며 서울에 남은 마지막 연탄공장으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2024년 들어서는 더 이상 가동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주변에 주택가가 빼곡히 들어서면서 민원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 해 7월 공장 가동이 중단되고, 철거 수순에 들어갔다. 공장이 세워진 지 56년 만이었다.
마지막까지 서민들의 추운 겨울을 따뜻한 온기로 채워주었던 이문공장이 사라지면서 서울에서는 모든 연탄공장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연탄과의 작별이었다.
2. 사업구조조정 통한 그룹 경쟁력 강화
레저사업과 유통사업 조기 종료
삼천리는 연탄사업을 정리하면서 다른 사업들에 대해서도 경영효율화를 기치로 내걸고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위태롭던 한국경제가 마치 소용돌이처럼 IMF 외환위기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면서 사업구조조정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기업들의 연쇄적인 도산에 이어 금융사들마저 M&A의 희생양이 되고, 급기야 국가경제가 모라토리엄(지급유예)을 선언할 가능성까지 제기되는 상황에서 경제적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전대미문의 경제적 위기가 도래하는 상황에서 삼천리는 더욱 단호하고 신속하게 사업구조조정들을 추진했다.
먼저, 1998년 9월 레포츠사업을 매각했다. 레포츠사업은 레포츠용품을 수입 판매하는 사업으로, 무역사업부를 운영할 당시 레저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예견하고 1992년 4월 <삼천리레포츠>를 설립하면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삼천리레포츠는 1996년에 500억 원대의 매출을 기록하는 등 나름 선전했다. 그러나 1997년 시작된 외환위기로 인해 막대한 환차손이 발생하며 사업이 어려워졌다. 결국 삼천리는 사업 시작 6년 5개월 만에 삼천리레포츠를 매각하고 레포츠사업에서 철수했다.
유통사업에서도 철수를 결정했다. 삼천리는 1993년 3월 1일 조직개편에서 유통사업본부를 신설하여 유통사업에 진출했었다. 당시에는 신세계가 국내 최초의 할인 양판점인 이마트를 개설하는 등 굴지의 대기업들도 앞다퉈 유통사업에 진출하던 때였다. 삼천리는 1992년 말 폐쇄한 수색공장 터에 삼천리마트 1호점인 수색점을 개설하여 유통사업을 시작했다. 오류공장과 시흥공장 부지 등 회사가 보유한 부동산을 활용하여 수년 내에 15개 점포를 운영한다는 계획도 수립했다.
그러나 유통시장의 경쟁이 과열되면서 극심한 혼탁 양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일부 기업들은 부실해질 조짐까지 보였다. 이만득 회장은 핵심역량이 부족한 사업 분야에 무리하게 투자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클 것으로 판단하고 추가 출점을 포기했다. 2호점을 세우려던 오류공장 터는 아파트를 건설해 분양하는 것으로 변경하고 시흥공장은 직원들에게 양도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외환위기가 닥친 것을 생각하면 한발 앞선 현명한 결정이었다. 삼천리는 수색점 단일 점포로 유통업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2004년 3월 폐점하여 유통사업을 정리했다.
도시가스 배관 환상망 구축
삼천리는 도시가스 보급 확대를 위해 배관 등 공급시설에 투자를 지속했다. 외환위기로 인해 기업들이 투자를 축소하고 심지어는 현금유동성 확보를 위해 기존 투자마저 회수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삼천리는 “위기 상황에는 오히려 투자를 강화해야 한다”는 역발상으로 과감하게 투자를 단행했다.
1992년부터 1996년 사이에 삼천리는 배관망을 확충하는 데 매년 300억 원대의 사업비를 투입했다.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부터 2001년 사이에는 대다수 기업들이 투자를 줄이는 상황인데도 오히려 매년 600억 원대로 투자 규모를 늘려 공급관, 정압기, 안전시설 등의 공급시설을 확충했다.
이만득 회장은 “도시가스 배관 투자는 선행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은 투자 회수 기간이 100년 이상인 곳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도시화가 진행되어 인구가 늘고 가스 판매가 증가할 것이다. 또 배관공사 시공비와 자재비가 계속 인상될 것이므로 조기에 투자를 단행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역설했다. 이만득 회장의 이러한 혜안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에 약 11억㎥이던 판매량이 2000년에는 약 22억㎥로 4년 만에 두 배나 증가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삼천리의 배관 투자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배관 환상망(環狀網)을 조기에 구축했다는 점이다. 환상망이란 한쪽 방향에서 천연가스 공급이 가능한 기존의 배관 방식과는 달리 양방향으로 공급이 가능한 배관망을 말한다. 따라서 환상망은 어떠한 경우에도 도시가스 공급이 중단되지 않고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삼천리는 1995년에 부천~안산 구간의 10.6km에 환상 배관망을 구축하고 2000년에는 안양~시흥 4.9km 구간을 연결했다. 2001년에는 반월~구운 사이 9.7km의 배관을 한국가스공사로부터 인수하여 안산~수원~안양을 잇는 환상망을 갖추었다. 그리고 2004년 11월 30일 오산~평택 구간 4.7km 길이의 환상망 배관공사를 완공함으로써 인천에서 평택에 이르는 도시가스 배관 간선망 구축을 완료했다. 이에 따라 삼천리는 3,830km의 배관망을 구축하여 공급권역 내 모든 지역에서 안정적인 공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2005년 4월 삼천리는 국내 도시가스 회사 중 처음으로 ‘삼천리 배관기술기준(Samchully Pipeline Engineering Standard: SPES)’을 완성하여 배관기술 표준화와 배관 안전 관리에 획기적인 이정표를 세웠다. 2002년 안전기술팀 주관으로 배관기술기준 제정 작업에 착수한 삼천리는 해외 선진기업의 사례를 연구하고 현장 기술자의 제언, 국내 공사 환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3년 만에 13권에 달하는 방대한 작업을 완료했다. 이로써 삼천리는 배관 설계, 공사방법 및 유지관리 요령 등 배관공사 전반에 걸쳐 체계적인 관리·시공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배관의 안전성 제고에도 큰 진전을 이루게 되었다.
코크스와 활성탄 사업 철수
삼천리는 연탄사업의 연장선상에서 추진했던 사업들도 하나둘 정리했다. 장차 환경사업 진출을 염두에 두고 그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시작했던 활성탄 사업도 그중 하나였다.
삼천리는 1993년에 환경사업부를 설치하는 등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활성탄 사업에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었다. 국내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환경 문제가 공통의 이슈로 등장한 만큼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성장 가능성이 크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가의 중국제품이 대량으로 유입되고 재생탄이 등장해 시장을 교란하면서 사업성이 악화돼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사업 정리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삼천리는 1998년 12월 31일 생산설비를 한승기업에 매각하고 사업에 착수한 지 10년 만에 활성탄 사업을 정리했다.
삼천리는 코크스 사업도 과감하게 정리했다. 사실 코크스 사업은 삼천리에게는 많은 미련이 남는 사업이었다. 삼천리가 1976년 사업다각화 전략을 펼치며 진출한 첫 사업인 데다, 1980년대 초부터 흑자를 기록하며 꾸준히 성장해 온 사업이기 때문이다. 사업의 성공을 위해 많은 정성을 기울인 사업이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값싼 중국산 코크스의 수입이 급격히 늘어났다. 더욱이 해상운임 인상 등의 원가 상승 요인까지 겹치면서 국내에서는 가격경쟁력을 갖추기가 어려워졌다. 삼천리는 품질 개선과 판매처 확보에 주력하는 한편, 생산비를 절감할 수 있는 해외시장으로의 진출 방안을 검토했다.
꾸준히 해외시장을 탐색한 끝에 중국 진출이 성사되었다. 삼천리는 1994년 12월 중국 산시성(山西省) 성도 타이위안(太原)시에 있는 현지 기업 진매유한공사와 합작하여 주물용 코크스공장을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1995년까지 1차로 150만 달러를 투입하여 연산 3만 톤 규모의 코크스공장을 타이위안시 청쉬(淸徐)현에 건설하고, 1996년 말까지 200만 달러를 추가로 투입하여 코크스 생산능력을 연산 10만 톤까지 늘린다는 내용이었다. 양사의 합작 비율은 삼천리와 진매유한공사 측이 각각 55%와 45%로 한다는 데도 합의했다. 합작기간은 30년으로 하고 법인명은 <산서삼원매화유한공사>, 법인 대표는 삼천리의 해외사업부장이 맡기로 했다.
이에 따라 삼천리는 1995년 3월 타이위안시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여 공장 건설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투자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합작 파트너사인 진매유한공사의 경영 부실이 드러나 공장 건설은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중국 코크스공장 건설계획이 실패로 끝나고 국내 사업 역시 회생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게 되자, 삼천리는 코크스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하고 1996년 9월 30일 천안 코크스공장의 가동을 중지했다. 이로써 삼천리는 사업 진출 20년 만에 코크스 사업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
삼천리주택·삼천리기계의 합병 및 정리
삼천리는 과거 사업다각화를 추진하면서 삼천리주택과 삼천리기계를 설립해 운영해 왔다. 기대와 의욕을 가지고 설립한 회사들이지만 두 회사 모두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고 고전해 왔다. 삼천리주택은 이미 대기업 중심으로 시장구조가 고착화된 주택분양 시장에서 전문인력과 경험의 부족으로 난항을 겪고 있었다. 1980년대에 정밀기계 분야를 중심으로 성장하며 천안에 대규모 공장까지 건설했던 삼천리기계도 실적 부진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했다.
삼천리는 합병을 통해 회생을 모색하고, 여의치 않으면 정리하기로 했다. 기업 회생을 위한 마지막 처방인 셈이었다.
1997년 9월 삼천리는 삼천리주택과 삼천리기계를 <㈜삼천리M&C>로 합병했다. 합병 직후인 1997년 11월에는 기계사업 부문을 정리하기로 하고, 주물공장은 ‘삼천리금속’으로, 공업로 사업은 ‘삼천리공업로’로 분사했다. 또 정밀기계 사업은 협력업체에 양도했다. 삼천리가 사업을 분야별로 쪼개서 정리한 것은 사원들의 고용 승계를 최우선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삼천리는 해당 사업에 전문성을 가진 임직원이 사업을 계속 영위하며 고용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상호와 부지, 시설 등도 일정 기간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통합법인 삼천리M&C도 뾰족한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IMF 외환위기에서 제대로 된 회생책을 찾기 어려워 경영은 더욱 어려워진 것이다. 결국 삼천리는 삼천리M&C를 폐업하기로 하고 2002년 2월 청산 절차를 밟아 최종 정리했다. 이로써 삼천리는 주택건설 사업과 기계 사업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삼천리열처리 매각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던 삼천리열처리는 1996년 이후 경영이 정상화되었다. 자동차업계 노사분규의 여파로 생산에 일시적으로 차질을 빚기도 했지만, 기술력 제고와 생산시설 현대화에 노력한 덕분에 실적이 향상되었다. 외환위기 상황에서도 비전문 영역의 사업은 정리하고 강점이 있는 분야는 경영체질 개선으로 경쟁력을 강화해 큰 고비 없이 사업을 영위했다.
이에 힘입어 불량률이 10분의 1로 감소하고, 2000년 9월에는 KSA 9002, ISO 9002 인증을 취득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2001년에는 대우자동차로부터 1등급 지정업체 인증을 받아 현대·기아·대우 등 국내 3대 자동차 업체 모두로부터 열처리 품질과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2001년 10월에는 한국능률협회로부터 품질경영 최우수기업 인증을 받기도 했다. 2003년 7월에도 안산공장과 부산공장이 모두 세계 자동차 산업의 글로벌 기술 규격인 ISO/TS 16949 인증도 받아 다시 한번 기술력을 공인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2010년대 들어 삼천리열처리는 경영환경의 급격한 변화 속에 비주력 사업을 정리한다는 방침에 따라 정리 수순을 밟게 되었다. 안산공장은 2010년 6월 사원들에게 양도하는 방식으로, 부산공장은 2006년 11월 1일 <삼천리열처리부산> 법인으로 분리한 후 2011년 3월 매각하는 방식으로 정리되었다. 이로써 삼천리의 열처리 사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미성상사와 삼천리제약의 안정적 성장
다른 관계사들에 비해 미성상사와 삼천리제약은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 기조를 이어갔다. 특히 미성상사는 1993년 이후 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에 대규모의 생산거점을 마련하여 세계시장을 개척해 나갔다. 덕분에 1994년부터 흑자 기조를 이어가 1999년에는 처음으로 매출 300억 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미성상사는 1983년 세네갈에 최초로 현지법인을 설립해 성공을 거둔 이후 1991년 2월에는 토고에, 6월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추가로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또 1999년 2월에는 코트디부아르의 중심지인 아비잔에 영업소를 개설한 후 법인으로 승격했고, 2000년 8월에는 나이지리아에도 법인을 설립하는 등 생산 및 판매 네트워크를 사실상 아프리카 전역으로 확대했다.
미성상사는 이들 법인의 생산공장을 지속적으로 증설하고 판매망을 확대 구축해 인근 국가들로 영업 범위를 넓혀나갔다. 특히 남아공 법인은 중국산 제품에 대응하기 위해 2001부터 문화마케팅을 강화하고 유통망을 개선해 남부 아프리카 전역에서 꾸준한 매출 신장을 이끌었다. 또 나이지리아법인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소비시장을 보유한 나이지리아 시장의 특성을 감안하여 2001년 추가로 설비투자를 단행하고, 2002년에는 생산공장을 확장 이전하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서부 아프리카 시장을 주도했다.
미국 시장을 겨냥해 설립한 인도네시아법인은 눈에 띄는 성장세를 이어가며 세계 최대 가발업체로 성장했다. 1991년 첫 진출한 이후 1992년에는 서울 원효로공장을 이전해 세계 최대 규모의 해외 생산기지로 거듭난 인도네시아법인은, 철저한 품질관리와 디자인 개발에 힘입어 1996년에는 수출 실적 1,000만 달러를 돌파했다. 1997년 3월에는 자카르타 인근에 제3공장을 준공하고, 2003년 1월에는 특정 품목을 전담하여 생산하는 협력업체 시스템을 도입해 생산량을 늘렸다. 이에 따라 2004년 인도네시아법인은 5개 공장에 4,000여 명의 사원이 근무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종합 가발업체로 성장했다.
한편, 삼천리제약은 1994년 5월 시화 1, 2공장을 준공한 후 기존 양감공장에서 생산하던 원료의약 합성 부문을 옮겨와 의약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웰컴사에 대한 공급물량을 늘려나갔다. 또 1996년에는 생산능력 60톤 규모의 시화3공장을 건설하고 제5공장을 증설해 1998년 중반에는 전체 생산능력을 120톤 규모로 늘렸다.
1997년 들어와 삼천리제약은 웰컴사를 흡수 합병한 GSK(글락소 스미스클라인)사의 싸이미딘 수요물량 전체를 공급하는 등 전 세계 싸이미딘 수요의 95%를 공급하는 명실상부한 AIDS 치료제 분야 세계 최고기업으로 발돋움했다. 1998년에는 ‘AZT(Azidothymidine)의 세계화’를 목표로 고부가가치의 AZT 완제품 제조 및 판매를 시작해 브라질을 비롯한 제3세계 시장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원료의약품 공급 제약사로서의 입지는 한층 더 공고해졌다.
3. 엔지니어링 회사 삼천리ENG 설립
배관공사 전문 <삼천리ENG> 설립
도시가스 사업을 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는 가스 배관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일이다. 배관은 도시가스라는 상품을 고객에게 제공하는 유일한 판매 채널이기 때문이다. 배관이 없으면 상품을 공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삼천리의 도시가스 공급을 위한 배관공사는 삼천리M&C가 담당해 왔다. 그런데 2000년대 초 삼천리M&C의 경영부실이 심해져 더 이상 존속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도시가스 공급 확대를 위해 계속해서 배관망을 확충하던 삼천리로서는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삼천리는 기술과 시공 능력을 갖춘 배관공사 전문회사를 설립하기로 하고, 2002년 1월 자본금 전액을 출자하여 <㈜삼천리ENG>를 설립했다. 초대 대표이사에는 김경이 삼천리 부사장이 선임되었다. 삼천리M&C는 삼천리ENG 설립 절차가 마무리된 2002년 2월 28일 폐업 조치했다.
엔지니어링 회사를 표방하며 탄생한 삼천리ENG는 설립과 동시에 삼천리로부터 배관 시공 및 감독, 사후관리 등의 업무를 위임받았다. 그리고 평택 송화지구 공사를 비롯해 시흥 운연~월곶지구 환상망 공사, 오산~평택 환상망공사 등 삼천리의 역점 사업인 환상망공사를 맡아 수행했다. 설립한 지 3년 만에 330km를 시공할 만큼 성과는 탁월했다.
배관공사 외에도 삼천리ENG는 그동안 삼천리가 해왔던 가스기기 판매사업도 이관받아 수행했다. 가스보일러 판매사업은 삼천리가 가스 사용 고객의 편의와 안전을 위해 1988년에 시작한 사업이었다. 가스 사용 세대에서 가스보일러에 대한 불만이 계속되고 안전상의 문제도 종종 발생함에 따라 도시가스 공급자인 삼천리가 직접 보일러 판매에 나선 것이다. 처음에는 위탁 판매 형식이었지만, 1994년부터는 OEM 방식으로 생산해 삼천리 브랜드로 판매했다.
삼천리로부터 보일러 판매 사업을 이관받은 삼천리ENG는 국내 5대 보일러 제조업체와 OEM 공급계약을 맺고 가스보일러 판매를 시작했다. 삼천리 브랜드의 높은 신뢰도에 힘입어 2004년까지 불과 3년 사이에 약 30만 대를 판매할 만큼 실적도 좋았다. 그러나 삼천리 가스보일러가 판매 호조를 보이는 데 비례하여 중소 설비업자들의 판매가 위축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삼천리ENG는 고심 끝에 이들과의 상생을 위해 2006년 12월 보일러 판매 사업에서 철수했다.
운영관리·안전관리 위탁 업무 수행
2004년 7월 삼천리ENG는 삼천리가 시공한 수원 영통, 군포 부곡, 인천 승기, 부천 오정, 광명 소하, 인천 월미, 안산 본오 충전소 등 7개 CNG 충전소의 운영관리 업무를 위탁받아 운영을 시작했다. 엔지니어링에 이어 관리서비스 분야로 사업의 폭을 넓힌 셈이다. 2005년에는 삼천리의 대형 산업용 도시가스 수요처에 대한 관리 업무도 수탁하여 관리서비스의 영역을 더욱 넓혔다.
2004년 10월 11일에는 삼천리의 안전관리 업무를 대행하기로 함에 따라 안전관리 업무를 선진화·전문화하여 서비스 품질을 높이겠다는 목적으로 안전관리 대행사인 경인씨지에스, 경기씨지에스를 자회사로 설립했다. 2005년 3월 11일에는 경수씨지에스를 추가로 설립해 자회사의 수를 3개로 늘렸다. 이들 3개 사의 자본금 5억 원은 삼천리ENG가 100% 출자했다.
4. ㈜삼탄, 글로벌 자원개발 전문기업 변신
‘최고의 광산’ 정암광업소 폐광
오랫동안 우리나라 최고의 탄광으로 꼽혔던 삼척탄좌 정암광업소는 1990년대 초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석탄 산업이 급격히 쇠락하는 가운데 채탄 생산성의 저하 등 여러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인도네시아 KIDECO 파시르 탄광에 많은 자금이 투입된 것도 자금 운용에 어려움을 가져왔다.
삼척탄좌는 혁신적인 변화를 통해 돌파구를 모색하기로 하고, 1993년 2월 24일 상호를 <주식회사 삼탄>으로 변경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2월 26일에는 유상덕 회장이 취임했다. 유상덕 회장은 산적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업구조 혁신 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1994년 12월 31일 한인니자원개발을 흡수합병했다. 파시르탄광의 개발 성과를 활용하여 삼탄의 재무안정성을 높이려는 포석이었다. 그 결과 1995년 삼탄은 수년간 계속되던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다. 그러나 당기순이익은 흑자가 되었지만 영업이익은 여전히 적자를 면치 못했다.
국내에서도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암광업소의 사정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이 본격화한 1995년 이후에는 석탄 생산량이 급감하여 버티기가 더 어려워졌다. 1994년에 101만 6,000톤이던 생산량이 1995년에는 66만 3,000톤으로 34.7%나 감소했다. 이후에도 생산량 감소는 계속되었다. 자연히 정암광업소의 인원은 1993년 말 2,200명에서 1995년에는 1,000명 이하로 떨어졌다.
결국 삼탄은 경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퇴직금과 위로금을 지급하며 노동조합의 협조 속에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아름다운 이별’ 수순에 들어간 것이다. 다만 이별하는 과정에서도 노사 간의 협조를 원만하게 이끌어낸 덕분에 삼탄은 1999년 2월 25일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주최한 ‘보람의 일터 대상’에서 중소기업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삼탄은 정부의 감산지원금을 활용하여 경영손실 규모를 축소하고 해외사업 부문에서 벌어들인 자금을 활용하여 정암광업소를 최대한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2000년 말 누적 결손 규모가 325억 원에 달하게 되자 결국 폐광을 결정했다. 그리고 2001년 9월 28일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찬반 투표에서 무려 70%가 넘는 동의가 나옴에 따라 행정절차를 거쳐 2001년 10월 31일 정암광업소를 폐광했다. 1964년 처음 개광한 이후 37년 만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탄광 중 하나였던 정암광업소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파시르 탄광, 세계 10대 탄광 반열에
정암광업소를 폐광함에 따라 인도네시아의 KIDECO 파시르 탄광이 삼탄의 주력사업장으로 떠올랐다. 1989년 이후 본궤도에 오른 파시르 탄광은 삼탄이 시작한 해외 자원 개발사업의 시금석이 될 수 있는 사업으로서, 삼탄의 미래가 걸린 사업이기도 했다.
현지법인 KIDECO는 1992년 10월 탄광을 준공하고 시험생산을 거쳐 1993년 3월부터 로또 강북지역에서 본격적인 상업생산을 시작했다. 상업생산을 준비할 때는 탄광 여건에 적합한 채탄법을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었으나, 정암광업소의 심부 채탄 경험을 바탕으로 ‘급경사 계단식 채탄법’을 자체 개발하여 해결했다.
그러나 로또 지역의 광산 규모는 가채량이 2,500만 톤 정도여서 사업계획대로 매년 200만 톤씩 채탄한다 해도 12년 동안 채탄할 수 있는 소규모였다. 상업생산 이후 30년 동안 채탄하기로 되어 있는 인도네시아석탄공사와의 계약에 비추어봐도 투자비에 비해 너무 빈약한 수준이었다.
고심 끝에 삼탄은 과거 경제성 부족을 이유로 포기했던 사마랑가우 강 지역을 개발하기로 했다. 탐사 초기 가채매장량이 4억 5,000만 톤에 이르는 유연탄광으로, 과거와는 시장 여건이 달라져 이제는 경제성 확보가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개발 과정에서는 탄광 쪽으로 흐르던 물길이 문제가 되었으나 물막이 댐 공사를 벌이는 모험을 감수하여 탄광을 확보했다. 1차 증설 공사로 개발을 추진한 이 탄광은 1997년 12월 15일 성공적으로 준공했다. 이에 따라 파시르 탄광의 총 생산능력은 연간 750만 톤으로 대폭 확장되었다.
한편으로는 1993년 말부터 로또 강남지역에 대한 정밀탐사도 진행했다. 한국전력과 일본추부전력으로부터 수주도 받아놓은 상태였다. KIDECO는 지형적인 악조건을 무릅쓰고 로또 강남의 모든 지역에서 200m 단위로 정밀탐사를 진행하여 총매장량 3억 2,000만 톤, 가채매장량 2억 톤에 이르는 대규모 탄맥을 확인했다. 이에 KIDECO는 1999년 11월 2일 파시르 탄광 2차 증설에 착수하여 2000년 12월 준공했다. 그 결과 파시르 탄광은 연산 1,500만 톤을 생산하는 세계적인 규모의 대규모 유연탄광으로 발돋움했다.
파시르 탄광은 2차 증설이 끝난 2000년에 808만 톤의 유연탄을 생산했다. 또 2001년에는 1,033만 톤의 유연탄을 채탄하여 연간 생산량 1,000만 톤을 돌파했다. 이에 힘입어 파시르 탄광은 세계 10대 유연탄광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1,000만 톤이라는 기록은 한국에서 역대 최고의 무연탄 생산량을 기록했던 1987년 2,400만 톤의 절반에 가까운 엄청난 양이었다. 과거 삼척탄좌가 최고 채탄량을 기록했던 1986년의 157만 톤과 비교하면 6.4배나 많은 양이었다.
글로벌시장 개척
KIDECO 파시르 탄광이 연간 1,000만 톤 이상의 생산실적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연탄 수요처를 충분히 개발한 덕분이었다. 삼탄은 1989년 파시르 탄광 개발 프로젝트를 재개한 이후 수요처 확보에 노력하여 1992년 초 한국전력을 최초의 수요처로 사전 확보했다. 1993년 3월 본격적인 상업생산을 시작할 수 있었던 데는 한국전력의 존재가 큰 힘이 되었다.
KIDECO는 상업생산을 시작한 첫해에 115만 8천 톤의 유연탄을 생산했다. 이 중 90만 3,000톤을 한국전력에 공급하고 포항제철에도 6,000톤을 공급했다. 또 일본의 EPDC사에 3만 3,000톤, 일본 내 산업용으로 9,400톤을 수출하고, 인도네시아 PTBA에 조광료로 1만 5,000톤을 공급했다.
한국전력에 공급한 KIDECO탄의 규모는 1994년 150만 톤, 1995년 190만 톤, 1996년 240만 톤으로 매년 증가했다. 한국전력은 소비량도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해외시장 개척에 나선 KIDECO와 삼탄에게는 성공사례와 같은 것이어서 새로운 수요처를 확보하는 데 본보기가 돼 주었다.
유연탄 생산이 본격화함에 따라 세계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삼탄과 KIDECO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가장 먼저 도전한 지역은 일본이었다. 당시 일본의 발전소들은 종합상사를 통해 유연탄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삼탄은 일본의 종합상사와 화력발전소들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벌였다. 그 결과 일본추부전력이 일본 발전소 가운데 처음으로 KIDECO탄 구매를 시작했다. 일본전력회사(EPDC)도 1996년부터 정기적인 구매를 시작했다.
삼탄과 키데코는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시장 진출도 추진했다. 그리하여 1995년부터 대만 TPC에 KIDECO탄을 납품하게 되었고, 인도네시아 자바전력에는 1998년부터 2027년까지 30년 동안 매년 180만 톤 규모의 KIDECO탄을 공급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이 밖에도 1995년에는 인도, 1996년에는 필리핀, 태국, 칠레, 그리스, 그리고 1998년에는 스페인, 슬로베니아에 키데코탄 수출을 시작하는 등 세계 각국으로 수출시장을 확대함으로써 삼탄과 KIDECO는 세계시장을 누비는 글로벌 자원개발 기업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KIDECO의 현지화와 수출시장 다변화
삼탄이 1982년 인도네시아석탄공사와 체결한 조광권 계약에는 상업생산을 시작한 후 10년이 경과하는 시점에 KIDECO 주식의 51%를 인도네시아의 개인이나 법인에게 양도한다는 조건이 포함돼 있었다. 주식의 양도는 파시르 탄광을 위해 투자한 삼탄의 투자 성과를 회수하는 것인 동시에 KIDECO가 글로벌기업으로 도약하는 일이기도 한 것이어서 삼탄에게도 주식 양도는 중요한 일이었다.
삼탄은 2003년부터 KIDECO 주식의 매각 작업을 추진했다. 이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돼, 2003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그동안 전량 보유했던 KIDECO 주식 가운데 51%를 인도네시아 현지인에게 매각했다. 출범 21년, 상업생산 10년 만에 삼탄 단독 출자법인에서 합작법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 사이에 파시르 탄광의 생산성이 급격히 향상돼 KIDECO의 기업가치는 더욱더 상승했다. 2002년 1,151만 톤이던 연간 생산량은 2003년에는 1,402만 톤으로, 2004년에는 1,690만 톤으로 늘어났다. 이는 세계 유연탄광 중 단일 탄광 생산규모로는 7위, 인도네시아 내에서는 3위에 해당하는 실적이었다. 국내에서 소비되는 전체 유연탄의 40%를 공급할 수 있는 수준이며, 총매장량 8억 톤은 우리나라의 모든 발전소가 18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였다.
KIDECO의 현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삼탄과 KIDECO는 수출시장을 다변화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국내에서도 연료탄 구매처를 다변화하는 경향이 나타남에 따라 삼탄은 KIDECO탄의 국내 반입량 증가에 주력했다. 또 인도네시아 내 3개의 대형 발전소와 기타 두 곳의 수요처를 추가로 확보하여 2002년에는 KIDECO 총생산량의 40% 이상을 인도네시아 내수시장에 판매했다.
2004년부터는 대만이 확고한 시장으로 자리를 잡았고, 일본의 시장 환경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삼탄과 KIDECO는 슬로베니아,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시장과 칠레 등 남미 시장, 인도와 필리핀 등 아시아 시장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강화하여 전 세계로 시장을 다변화했다.
한편, KIDECO는 2004년 4월 인도네시아 로또 중부지역 광구를 추가하여 연 1,690만 톤의 유연탄을 생산했고, 2005년 10월에는 누적 생산량 1억 톤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또한 2004년 12월부터는 1,120만 톤 규모의 4단계 증설공사를 추진해 2006년 3월에 완공했다. 이에 따라 KIDECO의 연간 생산 규모는 2,200만 톤으로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