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이야기
삼천리 창립과
도시가스 사업 진출
1955 ~ 1992
- Section 1. ‘삼천리연탄기업사’ 창립과 성장기반 구축
- Section 2. 국내 최대 연탄 공급자로의 성장
- Section 3. 연탄 사업 수직계열화와 사업다각화
- Section 4. 삼천리그룹 여의도 시대의 개막
- Section 5. ‘친환경 에너지’ 도시가스 사업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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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6. 연탄 사업의 축소 및 관계사의 성장
- 1. 연탄 및 석탄 연관 사업의 침체
- 2. 삼척탄좌의 성장과 해외자원개발
- 3. 사업경쟁력 확보 위한 관계사들의 도전
Section 6
연탄 사업의 축소 및 관계사의 성장
1. 연탄 및 석탄 연관 사업의 침체
연탄 산업 사양화 추이의 가속화
우리나라는 1970년대에 발생한 두 차례의 석유파동 이후 에너지 다변화를 추진하여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원자력, 석유 등 대체 에너지가 빠르게 보급되었다. 특히 평택 LNG 인수기지와 주 배관로 등 가스공급시설이 건설되면서 도시가스의 보급률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청정연료로 평가되는 도시가스의 보급이 확대되는 데 비례하여 서울 등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연탄 소비는 급감했다. 더욱이 연탄에서 발생하는 대기오염 문제와 연탄가스 중독사고 등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며 청정에너지로 전환하려는 흐름이 가속화되었다. 처음에는 도시가스라는 연료가 낯설어 주저하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도시가스의 혜택을 받고자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1980년대 중반 정부는 86 서울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대기환경 개선을 위한 정책을 강화하면서 석탄산업의 구조조정을 강력히 추진했다. 석탄개발임시조치법과 석탄광업육성법, 석탄수급조정법을 통합해 ‘석탄산업법’을 제정하고, 곧이어 ‘석탄산업 합리화 대책’을 수립해 시행에 들어갔다. 1986년 4월에는 직할시급 이상 대도시의 일정 규모 이상 신축 건물과 주택에 대해 연탄 사용을 금지하고, 1989년 12월에는 연탄을 사용하는 가구가 도시가스로 전환할 경우 제도적으로 지원을 해주는 시책을 펼치는 등 LNG로의 연료 전환을 유도했다.
그 결과 도시가스는 빠르게 보급되었지만, 반대로 석탄산업은 급속도로 위축되었다. 1982년 2,000만 톤을 넘어섰던 연간 석탄 생산량은 1988년에 2,430만 톤으로 최고점을 찍은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1988년에 347개에 이르던 탄광도 소규모 탄광부터 줄줄이 폐쇄되기 시작해 1996년에는 11개로 축소되었다. 더욱이 석유 가격은 하락 안정세를 유지하는 데 반해 연탄 가격은 상승하는 추세를 보이면서 석탄 제품의 경쟁력은 점점 더 떨어졌다.
수색공장 폐쇄
삼표연탄, 동원연탄과 함께 오랫동안 3강 체제를 유지해 온 삼천리연탄은 1986년에 판매량 250만 톤을 달성하며 사상 최고의 실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 이후 매출이 감소하기 시작해 1987년에는 판매량 235만 톤에 머물렀다. 연탄 사업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것이다. 이후에도 1989년 191만 톤, 1991년 150만 톤으로 판매량은 계속 감소했다.
석탄산업의 사양화 추세가 확연해지면서 연탄 제조업체들은 앞을 다퉈 연탄 사업 축소에 나섰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삼천리는 가급적 연탄 사업을 지키고자 했다. 연탄을 유일한 연료로 사용하는 서민들을 생각해 연탄 사업 정리를 최대한 늦추고자 한 것이다. 유성연·이장균 두 창업자는 “마지막 한 사람의 고객이 있을 때까지 연탄을 공급하겠다”는 말로 삼천리 성장의 밑거름이 된 연탄과 고객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인현철 사장도 “비록 사정이 어려워진다 해도 연탄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며 고객에게 유익한 연료를 공급하겠다는 창업 정신을 되새겼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와서는 삼천리도 더 이상 연탄 사업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1992년 삼천리는 연탄 사업 정리 계획을 수립하고, 그해 6월 30일 수색공장을 먼저 폐쇄했다. 연탄 사업을 일거에 정리하지 않고 통폐합을 통해 점진적인 축소 방식을 선택한 것은 아직 연탄을 사용하는 고객을 배려한 결정이었다.
코크스와 활성탄 사업의 시련
삼천리가 석탄 사업의 연장선상에서 시작한 코크스 사업은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1981년 첫 흑자를 기록한 이후 한동안 성장세로 구가했다. 1982년에는 대체원료 개발에 성공하여 더 큰 도약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코크스 사업은 자체 기술진의 노력으로 혁신적인 원가절감과 공정개선에 성과를 내면서 그 후 5년 동안이나 가격 인상을 하지 않고도 이익을 내는 저력을 과시했다. 시장점유율은 무려 60~70%에 달했고, 1986년에는 삼천리 전체 이익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약진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들어서는 그동안 가격 인상을 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또 영세한 주물공장들이 원가절감이라며 값싼 중국산 코크스의 사용을 늘리면서 코크스 사업의 어려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해상 운임의 상승으로 원가 부담이 커진 것도 어려움을 가중시킨 요인 중 하나였다. 삼천리는 1990년 초부터 중국산 코크스에 대응하여 코크스 사업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중국 등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기도 했다.
한편, 이 무렵 삼천리는 활성탄소라는 새로운 사업을 준비했다. 활성탄(活性炭)은 숯에 수증기 또는 인산과 같은 약품을 사용하여 표면적을 증가시킨 탄소 소재를 말한다. 각종 오염물질이나 세균, 중금속 등을 걸러내는 기능이 있어 대기오염 방지시설이나 정수 및 오폐수 처리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따라서 환경과 건강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는 시대적 흐름을 감안하면 향후 성장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삼천리는 1980년부터 한국화학연구소와 활성탄 제조에 관한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하며 활성탄소 사업을 준비했다. 1987년 1월부터 2년에 걸쳐 일본의 스미토모중기와 활성탄 제조 장치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삼천리는 활성탄소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고, 1989년 12월 12일 연산 2,500톤 규모의 고품위 활성탄소를 생산하는 제1기 활성탄소 제조공장을 준공했다.
동시에 천안 직산의 코크스공장 내에 기술연구소를 설립해 활성탄 제조 공정상의 품질관리, 완성품에 대한 평가와 성능시험, 새로운 공정 및 제품 개발 등의 업무를 주어 활성탄의 경쟁력을 높이도록 했다. 기술연구소는 코크스 사업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환경사업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며, 활성탄 사업의 본격 진출에 대비한 연구개발을 위해 1990년 10월 천안 코크스공장 안에 설립한 R&D 조직이다.
활성탄소 사업은 사업 첫해인 1991년에 1,200톤을 판매해 22억 원의 매출을 달성하며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에 삼천리는 1992년 10월 제2기 활성탄 생산설비를 준공해 생산능력을 연산 6,000톤으로 확대했다. 1992년에는 정부의 환경오염 규제 강화, 수질 문제에 대한 인식의 변화 등에 힘입어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전년보다 51% 신장한 1,817톤의 활성탄소를 판매해 29억 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그러나 활성탄소 사업은 기대만큼 성장하지 않고 오히려 손실이 누적되었다. 시장이 이제 막 형성되는 시기에 초기 투자가 너무 컸고, 조악한 중국산 제품이 대거 수입되고 재생품이 범람하여 유통 질서가 혼란해지는 등 시장 환경이 열악해졌기 때문이었다. 사업성이 불투명해짐에 따라 결국 활성탄 사업은 199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정리 수순을 밟게 되었다.
2. 삼척탄좌의 성장과 해외자원개발
노사화합 속의 안정적 성장
국내 최고의 민영 탄광회사인 삼척탄좌는 삼천리 가족의 일원이 된 이후 안정적인 성장의 길로 접어들었다. ‘가정애·직장애’를 사시로 삼은 삼천리의 조직문화를 공유하며 노사화합의 본보기가 될 만큼 협력적인 분위기도 조성되었다.
1979년 9월에는 정암광업소에 종합사무동 본관을 완공해 한층 쾌적한 근무환경이 조성되고 미래 성장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졌다. 모두 4개 층으로 설계된 종합사무동은 1,000명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샤워실, 수갱 종합운전장치가 설치된 종합운전실, 시청각교육실, 작업도구 보관실 등 갱내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복지를 증진하는 데 중점을 두어 건설되었다.
삼척탄좌의 노사화합 문화는 석탄산업 구조조정의 한파를 이겨내는 데도 큰 힘이 되었다. 1980년대를 관통한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은 불가피하게 인력구조조정을 동반하는 일이어서 갈등의 요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삼척탄좌는 다른 탄광업체들과는 달리 별다른 잡음 없이 평온을 유지했다. 1980년에 인근 지역에서 이른바 사북사태라고 부르는 대규모의 노사 갈등 사태가 발생했지만, 삼척탄좌의 노사는 별다른 동요 없이 채탄에 집중했다. 삼척탄좌의 노동조건과 복지가 그만큼 양호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삼척탄좌는 정암광업소 종합사무동에 국내 민영 탄광 최초로 컴퓨터를 도입해 관리업무의 합리화를 추진했다. 1982년 2월에는 박우병 사장을 새 대표이사로 선임해 명실상부한 전문경영인 시대를 열었다. 이어 8월에는 역도팀을 창단해 국가 체육 발전에 힘을 보탰고, 1984년 7월에는 삼봉 사택단지 안에 사원복지 증진을 위해 삼봉복지회관을 준공했다. 1985년에는 사보 <삼탄가족>을 창간해 계간으로 발행하며 노사간의 소통 매체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모범적인 노사관계를 구축했지만, 1987년에는 6·29선언 이후 전국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이때의 노사분규는 노조 내부의 갈등을 촉발하며 노사관계를 어렵게 만들었다. 석탄산업의 사양화 추세가 확연한 상황에서 노사분규가 발생하는 바람에 경영 위기를 불러오기도 했다. 다행히 1990년대 초 노사협상이 원만하게 타결되면서 삼척탄좌는 다시 안정적인 노사관계를 회복하고 함께 힘을 모아 경영 위기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정암광업소 수갱 건설과 생산시설 현대화
1981년 무렵 종합사무동 준공과 함께 삼척탄좌 정암광업소의 질적 성장을 이끈 것은 제1수갱 건설이었다. 1981년 5월 삼척탄좌는 오랫동안의 숙원이었던 제1수갱을 완공하며 본격적인 심부(深部)탄광 개발 시대를 열었다. 수갱의 모든 시설은 자동 혹은 반자동으로 조작할 수 있도록 시공되었고, 컴퓨터와 연계하여 중앙집중관리 제어시스템도 설치하여 안전성을 높였다.
이어 제1수갱과 지하 채광 현장에 맑은 공기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2수갱 건설에 착수하여 1984년 12월 준공했다. 수갱의 길이는 832레벨에서 시작해 250레벨에 이르는 542m였다. 제2수갱에는 국내 탄광 개발 사상 최초로 1분당 5,000㎥의 공기를 흡입할 수 있는 500마력짜리 대형 통풍기 2대를 설치했다. 이에 따라 수갱에서의 작업 능률이 크게 향상되었다.
정암광업소는 수갱과 중액선탄장 건설, 운반시설의 개선 및 기계화를 추구하는 동시에 채탄실적 향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기술 개발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제1수갱 건설 시 국내 최초로 점보드릴을 이용함으로써 굴진 작업 능률을 개선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 1983년에 진행한 갱도 굴착작업에 NATM(New Austrian Tunnelling Method) 공법을 적용하고, 주변 벽의 붕괴와 낙석을 방지하는 락 볼팅(Rock Bolting)과 와이어 메쉬(Wire Mesh) 등의 신공법을 적용하여 갱도 유지와 사고 예방에 크게 기여했다. 채탄한 원탄의 운반 전 과정이 벨트 컨베이어를 통해 자동으로 이루어지도록 함으로써 생산성의 획기적인 개선을 이루기도 했다.
이처럼 삼척탄좌는 근로환경 개선과 새로운 기술 개발에 주력하여 사고율을 줄이고 생산성을 높였다. 제1수갱과 제2수갱이 완공된 1985년 이후 삼척탄좌 정암광업소의 작업 능률은 전국 광산 중 최고 수준을 유지했다. 이에 따라 삼척탄좌는 1980년대 이후 국내 최고의 민영 탄광으로 발돋움했다. 1980년 매출 222억 원에 순이익 3억 원 수준이던 경영실적은, 1986년에는 매출은 전년 대비 148.8% 신장한 550억 원, 순이익은 125.4% 신장한 8억 원을 달성해 역대 최고의 실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파시르탄전 개발로 해외자원개발 시동
정암광업소가 국내 최고의 민영 탄광으로 자리매김하는 동안, 삼척탄좌는 해외자원개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75년 유성연 선대회장이 전국경제인연합회 해외시찰단의 일원으로 중동 지역을 둘러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해외자원개발에 대해 여러모로 검토한 유성연 선대회장은 1980년대 들어와 해외자원개발 사업을 펼치기로 했다. 그리고 삼척탄좌에 해외자원개발부를 신설하고, 첫 사업으로 알래스카 탄광 개발을 추진했다. 그러나 경제성을 확보하지 못해 이 사업은 무산되었다.
1981년 초에는 인도네시아 파시르탄전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광업진흥공사의 권유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1982년 3월 11일에는 한일시멘트, 범양상선, 용산화물, ㈜태웅 등 4개 사와 함께 합작법인 <한인니자원개발㈜>을 설립했다. 한인니자원개발은 사업 진행을 위해 9월 7일 인도네시아에 현지법인 <KIDECO(Korea Indonesia Development Company) JAYA AGUNG>을 설립했다. KIDECO는 9월 14일 인도네시아석탄공사와 자원 개발에 대한 본계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인 자원 탐사에 들어갔다.
탐사 과정에서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대상 지역이 워낙 광활해 측량과 탐사 활동도 힘들었지만, 찌는 듯한 무더위에 풍토병까지 기승을 부려 험난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많은 고생을 했지만 1차 탐사 결과는 실패로 끝이 났다.
1985년 초부터 2차 탐사가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화력발전소용으로 사용 가능할 것으로 판단되는 탄층을 발견했다. 그런데 합작사들이 경제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철수를 결정했다. 2차 탐사 결과도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삼척탄좌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독자적으로 프로젝트를 계속하기로 하고, 1989년 초 합작사들의 투자지분을 모두 인수했다. 추가로 소요되는 자금 2억 3,000만 달러 중 9,000만 달러는 정부의 해외자원 개발기금에서 융자받아 충당했다. 당시 우리나라 기업의 해외 개발 투자 규모로는 손꼽히는 대규모 투자였다.
삼척탄좌가 다른 합작사들이 철수한 후에도 이처럼 막대한 규모의 투자를 단행하며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유성연 선대회장에 대한 이장균 선대회장의 변함없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장균 선대회장은 파시르탄전의 가능성을 확신한 유성연 선대회장의 판단이 10년 앞을 내다본 예지라 믿고 지급보증을 결정했다.
삼척탄좌는 1989년 9월 파시르탄전 개발을 위한 시설 공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도로와 항만을 포함해 연산 150만 톤 규모의 생산시설을 건설하여 1992년 10월 준공했다. 이에 따라 국내 민간기업 최초의 해외자원개발 사업으로 기록된 파시르탄전 프로젝트가 수많은 난관을 딛고 본격적인 가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채탄 결과 파시르탄전의 유연탄은 품질도 우수하고 유황과 회분의 함량이 극히 낮은 초저유황탄·초저회분탄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특성은 화력발전소의 산업폐기물 처리 비용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어 다른 유연탄에 비해 경제적·환경적인 측면에서 매우 큰 장점이었다. 더욱이 국내에는 없는 노천광산이어서 생산비용도 절감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파시르탄전 개발을 계속한 삼척탄좌의 판단은 대성공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미래를 내다본 유성연·이장균 선대회장의 식견과 과감한 결단력, 해외자원개발에 대한 두 회장의 확고한 의지와 신념, 그리고 파시르탄전 탐사 및 개발 과정에 참여한 임직원의 헌신적인 노고가 만든 값진 성과였다. 여기에 정부 당국과 광업진흥공사의 지원도 큰 몫을 했다. 파시르탄전의 성공은 석탄산업의 급격한 침체 속에서도 삼척탄좌가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기업으로 거듭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한편, 파시르탄전 개발이 한창이던 1991년 7월 삼척탄좌는 탄광개발회사 이미지를 벗고 세계적인 자원개발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사옥을 신축했다. 여의도 삼천리빌딩에서 새 사옥을 마련해 이전함으로써 삼척탄좌는 약 10년에 걸쳐 삼천리와 함께 한 여의도 시대를 마감하고 강남 시대를 열게 되었다.
3. 사업경쟁력 확보 위한 관계사들의 도전
삼천리기계와 삼천리열처리의 기술력 강화
석탄 사업이 한계에 다다른 현실에서 사업다각화를 위해 설립한 관계사들은 설립 이후 저마다 사업의 기반을 구축하고 기술경쟁력을 확보하며 수익성을 제고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둔 곳은 삼천리기계였다. 정밀기계와 열처리 분야를 중심으로 기술력을 발휘하며 성장한 삼천리기계는 1980년대 들어서도 일본공업로의 기술을 도입해 가열로·용해로·도금로 등의 공업로를 개발하는 등 기술 확보 및 신제품 개발을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기술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삼천리기계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1983년에는 선반 척과 드릴 척 제품에 대해 일본공업규격(JIS) 표시 승인을 받았고, 얼마 후에는 고속 탁상 드릴링 머신, 중공형 유압 척, 가스 침탄로, 변성로, 진공로 등 여러 분야의 기계와 부품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1988년에는 일본 충정공사와 기술제휴하여 공작기계용 툴링도 개발했다. 이런 기술적 성과에 ‘척 하면 삼천리’라는 말이 기계부품업계에서 통용되기도 했다.
1990년대 초에는 일본 대동특수강회사의 기술을 도입해 STS로, 모텀 및 트랜스코어 소둔로, 메시 벨트식 동납부로, 전자동 도장설비 등을 개발했다. 한편으로는 높은 공신력을 가진 미국기계학회(ASME) 인증을 취득하여 북미 시장에서도 기술력을 인정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에 앞서 1980년대 말 삼천리기계는 적극적인 제품 개발을 바탕으로 사업경쟁력을 강화한다는 취지에서, 충청남도 천안시 성환읍에 대규모 부지를 마련하고 대형 주물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그리고 1989년 3월 1차 준공하여 주물용 제품 생산을 시작했고, 1992년 10월에는 전체 공장을 준공하여 본격적으로 주물 시장 공략에 나섰다. 주물공장 종합준공에 맞춰 삼천리기계는 이곳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삼천리열처리 역시 사업 경쟁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1987년 12월 서울 염창동 공장을 매각하고 안산 반월공단에 대규모 공장을 새로 건설하여 본사와 공장을 이전했다. 부산 지역 열처리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1978년 부산 사상공단에 설립한 부산공장도 그해 7월 중소기업형 열처리 전문공장에 지정되고, 1981년 4월에는 시범기술지도업체, 1983년 9월에는 유망 중소기업에 선정되는 등 기술력을 인정받으며 착실하게 사업 기반을 다져나갔다. 1989년 2월에는 설비를 증설하여 규모의 경제도 갖추었다.
반월공장과 부산공장은 모두 품질관리 1등급을 획득하고 열처리 가공 기술에 대한 KS 표시허가를 획득하는 등 기술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여기에 부가가치 높은 고가품 개발에 역량을 집중하며 생산성 향상과 품질 개선에 노력한 데 힘입어 삼천리열처리는 한동안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갔다.
그러나 1988년 이후 열처리 시장의 주 고객인 자동차 업계가 장기 파업과 노사 갈등으로 몸살을 앓는 바람에 예상치 못했던 어려움에 직면했다. 수주 물량은 감소했고 수익도 점차 악화되었다. 이러한 어려움은 1990년대 내내 계속되었다.
삼천리주택의 사업기반 확보 노력
1980년 4월 21일 설립된 삼천리주택은 1982년 3월 삼척탄좌 정암광업소로부터 150가구 규모의 삼봉 사택을 수주하여 건축공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고 더러 소규모 건축공사를 맡아 시공하는 데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중 1986년 강원도 원주시 학성동에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부지를 매입했다. 다만 지역 특성상 미분양이 우려될 수 있어 분양은 시장 상황을 보아가며 단계적으로 시행하기로 했다. 먼저 1989년 9월 291세대 규모의 1차 삼천리아파트 공사를 시작해 1991년 6월 준공하고 성공적으로 분양을 완료했다. 이어 1993년에 2차로 198세대를, 1996년에 3차로 238세대를 분양했다.
다만 3차 분양 시에는 초기 분양률이 저조했다. 이에 최고경영층에서는 “분양원가에서 단 1원만 남아도 분양한다”는 원칙을 정하고, 신규 계약자는 물론 기존 계약자들에게도 단 100만 원의 계약금만으로 계약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어 1997년 3월 분양을 완료하고 12월에는 입주까지 마쳤다.
이 공사에서 삼천리주택은 별다른 이익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처럼 파격적인 분양조건을 제시한 것은, 한편으로는 무주택 서민들에게 내집마련의 기회를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곧이어 닥친 IMF 외환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효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삼천리제약> 설립과 신약 개발
삼천리는 1980년대 초부터 정밀화학 사업 진출을 검토했다. 당시 유성연 선대회장은 “우리나라처럼 부존자원은 부족하지만 인적 자원이 우수한 나라에서는 기술적 우위를 점할 수 있고 응용 분야도 다양한 정밀화학 사업이 유망할 것”이라 판단했다. 이 같은 판단에 따라 1982년 4월 삼척탄좌 내에 사업개발실을 설치하고 정밀화학 분야의 신규사업 발굴에 나섰다.
사업개발실은 다각적인 연구 및 조사를 거쳐 제약업 진출을 제안했다. 이에 유성연 선대회장은 제약회사 신규 설립, 외국 제약회사와의 합작, 기존 제약회사 인수 등 여러 방안을 놓고 고민하다가 기존 회사를 인수하기로 하고, 1983년 8월 신광약품을 인수했다. 1949년 6월 설립된 신광약품은 30여 년 동안 영양제, 진통해열제, 진해거담제 등을 생산하는 업계 순위 133위(1982년 기준)의 소규모 제약회사였다.
삼천리는 신광약품을 인수한 후 자본금을 기존의 두 배인 1억 8천만 원으로 증자했다. 또 유성연 선대회장, 최희국 사장 등으로 경영진을 구성하고, 영업사원도 10여 명을 공개 채용하여 영업력을 보강했다. 1985년 2월에는 상호를 <㈜삼천리제약>으로 개명하여 삼천리 가족으로서의 일체감을 높이는 한편, 9월에는 경기도 화성군 양감면 대양리 1106-4번지에 양감공장을 준공하여 의약품 생산을 위한 기반을 확충했다. 1988년 1월에는 양감공장 내에 주사제 및 항생제 공장을, 3월에는 연산 23만 톤 규모의 원료의약품 공장을 준공했다.
삼천리가 제약 사업에 참여한 것은 단순히 약품을 제조·판매하는 것보다는 정밀화학산업의 토대가 될 신물질을 개발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실제로 삼천리제약은 한국화학연구소·KAIST와 각각 공동연구 계약을 체결하고, ‘세파만돌’이라는 항생제 원료 합성 분야와 ‘아사이크로비아(Acyclovir)’라는 대상포진 항바이러스제 원료 합성 분야의 연구에 착수했다. 그리고 1986년 가을 이 두 가지 연구에 모두 성공하여 업계를 놀라게 했다. 우리나라 제약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삼천리제약은 신개발 항생제 세파만돌과 아사이크로비아를 1988년부터 판매했다.
1987년에는 한국화학연구소의 제안으로 AIDS 치료제 지도부딘(AZT)의 합성에 대한 공동연구를 시작해 1988년 초 성공했다. AZT 합성 방식은 생산단가가 매우 낮아 시장성도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었다.
삼천리제약이 AZT의 본격적인 생산을 준비할 무렵, 영국의 웰컴사가 완제품인 AZT 대신 중간재, 즉 AZT의 원료가 되는 싸이미딘을 생산하여 전량 공급해줄 것을 요청해 왔다. 당시 웰컴사는 AZT의 용도특허를 가진 회사였으므로 삼천리제약은 AZT 대신 싸이미딘을 생산해 웰컴사에 수출했다. 비록 중간재를 수출하긴 했지만 싸이미딘의 수출은 삼천리제약의 성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연이은 원료의약품의 개발과 판매에 힘입어 삼천리제약의 매출은 급상승했다. 인수 첫해인 1983년에 거둔 매출액은 5억 원 수준이었으나, 매년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해 1989년에는 48억 원을 기록했다. 신개발 물질 덕분이었다. 이에 따라 이 시기에 삼천리는 정밀화학 분야에 상당한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미성상사, 세네갈 등에 해외법인 설립
미성상사는 삼천리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세계시장을 내다보고 인수한 무역회사이다. 삼천리가 인수한 후에도 미성상사는 한동안 가발 수출에 집중하며 업계 1위 가발 수출 전문업체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하지만 국가경제가 발전하면서 국내에서는 인건비가 상승하고 가발 생산을 위한 인모 수집조차 어려워지는 등 사업 여건이 점점 더 악화되었다.
이러한 때에 미성상사의 미국 내 수입업체 중 하나인 알리시아사가 아프리카 세네갈에 합작하여 진출하자는 제안을 해 왔다. 이에 따라 미성상사는 1983년 5월 알리시아사와 50 대 50의 지분으로 세네갈 법인 <비너스 인더스트리(Venus Industry Inc.)>를 설립하여 세네갈에 진출했다. 미성상사가 세운 최초의 해외법인이었다. 그러나 세네갈 법인은 설립 직후 합작사가 투자 지분을 철수함에 따라 미성상사 단독 출자법인으로 전환되었다.
세네갈 법인은 그해 11월 공장 건설을 마무리하고 ‘NINA’라는 브랜드로 가발 제품을 생산해 출시했다. 당시 세네갈에서는 가발업체들의 경쟁이 매우 치열했지만, 세네갈 법인은 이슬람 사회와 친분을 쌓고 인기가수를 모델로 라디오 광고를 집행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펼쳐 첫해부터 흑자를 기록했다. 첫해에 흑자를 낸 것은 우리나라 기업의 해외 진출 사상 최초의 일로 기록되었다. 세네갈 법인의 성공은 마침 수익이 악화하던 미성상사가 수익을 개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성상사는 성공적인 기업활동으로 세네갈공화국의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8년에 세네갈 정부로부터 국가산업훈장을 받았다.
이후에도 미성상사는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데 힘을 쏟았다. 국내에서는 1980년대 말 이후 임금이 급상승하고 노사 갈등이 심화하면서 저임금 노동집약적 생산 구조를 가진 가발산업의 존립 기반이 흔들리는 형편이었으므로 해외 진출을 통해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미성상사는 1987년에 원주공장을 폐쇄하고, 1990년 5월 인도네시아에 현지법인(P.T. Misung Indonesia)을 설립했다. 이어 1991년 2월에는 아프리카 토고에도 현지법인(STE. NINA S.A.R.L)을 설립하고, 6월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도 현지법인 <Venus Industries SA(PTY)Ltd>를 설립하며 아프리카 전역으로 네트워크를 확장했다. 그 결과 아프리카 시장이 미성상사의 주력 시장으로 급부상했다.